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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이별없는 세대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 김주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7월
평점 :
판매완료
김주언 옮김/218쪽
보르헤르트는 [문밖에서]라는 희곡으로 잘 알려진 편이라는데 문외한인 나로서는 금시초문이다. 도대체 그시절을 지나온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75년이었으니 초등학생인 내가 무얼 알겠는가 그러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위안받을게 없어 별걸다 가지고 위안을 받고있다. 쳇)
그 시절은 그야말로 삼엄한 유신시절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번역한 역자나 출판사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보르헤르트는 독일 함부르트에서 태어났고 2차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쟁을 체험한 경험과 그때 얻은 병으로 26세에 요절한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의 이러한 내력만으로도 짧은 그의 삶이 얼마나 혹독하고 힘겨웠는지 어느정도 짐작은 하겠지만 더 놀라운건 죽음을 앞둔 2년간 병상에서 대부분의 작품들을 집필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몇몇 작가들 로맹가리. 커트보네거트, 로알드 달 등은 참혹한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보르헤르트는 독일의 현실과 독재자에 대한 분노보다는 블랙유머로 글을 전재해나간다. 함축적인 문체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의미들.
짧은 단편들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책장을 넘길수 없는것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였기에 나름대로 해석해보려 햇지만 어떤 글을 부족한 나로서는 상황파악이 잘 안되는 글들이 더러 있다.
얇은 책을 몇일에 걸쳐 읽으면서 이 기이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몇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떤 글들은 책을 거의 펴보지 않는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낭독해서 들려주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회화적이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읽혀진다
대부분 여름에는 호러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추천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이런 서늘한 책이 오히려 가슴을 오싹하면서도 한켠으로 먹먹한 감성를 가져다 주는 이 책이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문밖에서]란 책을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되었고(정말 괜찮은 책은 빨리 절판된다는 불문) 연극은 보질 못해서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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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줘요, 기린아저씨>
그는 바람이 소용돌이쳐 지나간 텅 빈 밤릐 플랫폼에, 잿빛으로 그을고 달처럼 외로운 거대한 홀 안에 서 있었다. 밤이 되어 텅 빈 정거장은 죽어 무의미해진 세계의 종말이다. 텅 비고 공허하고 허전하다. 더 가려다 보면 길을 잃게 마련이다. 누구든 길을 잃는다. 어둠은 무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어둠은 순식간에 압도해오며 그것을 벗어날 자는 없다. 이 암흑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비명을 키운다. 고독한 짐승의 섬뜩한 비명을.(20)
<열차의 오후와 밤>
정거장은 어두운 거리와 나란히 선 이민들처럼 간판을 치켜들고 있다. 정거장이란 담배나 립스틱이나 술을 의미한다 . 아니면 신이거나 빵이다. 정거장의 창백한 이마들, 간판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창부다.
너는 인간이다. 네 두뇌는 기린처럼 외롭게 끝없이 긴 목 위쪽 어느 곳에 붙어 있다.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38)
<허공에 떠도는 한밤의 소리>
전차가 축축하게 안개 낀 오후 속을 달리고 있었다. 십일월의 거리는 텅 비어 소음도 환락도 없다. 누런 전찻길만이 외로이 안개 낀 오후 속에서 가물거렸다. 전차안에는 십일월의 오후에 길을 잃은 고독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전차는 십일월 속을 비틀거리며 질주했다.(39)
<까마귀도 밤이면 집을 찾는데...>
때이른 어둠의 그물이 낮시간 위에 서서히 덮히고 하늘에는 마지막 햇살이 방향을 잃은 채 격자창살처럼 비쳤다.(50)
도시는 잠에 겨운 수백만개의 눈을 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장막을 통해 버럼받은 포도의, 소음이 사라진 밤거리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53)
<지붕 위의 대화>
그들의 냄새는 밤의 냄새다. 무겁고 쓸쓸하고 달콤한 밤의 냄새다.(55)
달은 더러워진 달걀 노른자처럼 푸른 밤하늘의 국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달은 썩어보이고 악취를 풍기는 것 같다. 달은 병들어 보인다.(63)
<라디>
러시아에서 죽는 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냐. 나에게는 그곳은 모든 것이 낯설다. 나무마저 낯설다. 돌도 숲도 밤이면 신음을 한다. 눈도 비명을 지른다 그래, 모든 것이 생소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설다.(73)
<이별 없는 세대>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서로 만남도 과거도 없으며, 감사할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은 우리의 발과 가슴을 따가운 길거리 눈이 쌓인 길거리에서 헤메게 하였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다. 이별을 체험할 수도 없고, 체험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자칫 발길을 잘못 두면 거리를 헤메는 우리의 가슴에는 영원한 이별이 못박히기 빼문이다. 아침에 이별을 보게 될 하룻밤을 위해서 우리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98~99)
우리는 아무 만남도 없고, 오래 머물지도 않고,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향이라고 할 만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줄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미래가 있는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생활, 별의 세계로 가는 세대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미래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101)
<내 창백한 형제>
이 눈처럼 흰것이 또 있으랴. 눈은 거의 창백하다고 할만큼 희다. 푸른 녹색 빛이 난다. 그렇게 지독하게 희다. 태양은 감히 이 눈앞에서 누런 빛깔이 될 엄두도 못 낸다. 어는 일요일 아침도 이처럼 깨끗했던 적이 없었다. 세상, 눈 덮인 일요일의 세상이 웃었다.(123)
<민들레꽃>
문은 내 뒤에서 닫혔다. 문이 사람 뒤에 닫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아주 잠기는 일도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집 문이라는 것들은 무언가 최후의 것, 닫히는 것, 넘겨주ㅡㄴ 것 들과 같은 의미이다 이제 그 문은 내 뒤에 밀려져 이쓴ㄴ 것이다 그것은 함부로 닫아버릴수 없는 두꺼운 문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그것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열심히 올리는 기도에도 꼼짝달싹하지 않으니까 말이다.(154)
불안과 밤. 불안은 무시무시한 것. 밤은 윌가 그와 단둘이 있일때 유령처럼 무시무시한 것이 된다. .(156)
이 세상에 마지막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속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다른 문들이 뒤따라 열렸다. 문들은 모두 겁에 질리고 초췌한 사내를 일렬로 밀어내어 한가운데 푸른 줄이 덮이고 잿빛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마당 안으로 몰아넣었기 빼문이다.(158)
<도시>
함부르크! 거기서 다시 떠나가야지. 거기에 도착하면 다시 또 떠나가야 한다. 항상 떠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다!. 유일한 삶!
삶이란 빗속을 달려가며 문의 손잡이를 붙잡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죠. 그것은 얼굴을 서로 스쳐가며 냄새를 생각해내는것 이상의 것입니다. 삶은 말이에요 불안과 기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차 밑으로 들어가는 불안. 기차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 기쁨. 계속해서 더 걷는 기쁨.(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