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7~8)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을 얘기하자면 얼마전에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읽고 나서 그의 책들을 모조리 찾아보다가 <로마의 테라스>,<세상의 모든 아침>이 절판되엇음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테라스>는 더더욱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만든 책이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판사에 전화와 이메일을 보내 이책의 출간여부와 재고를 문의했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책을 보지 않고서는 다른 책을 볼수가 없을 정도로 내 머리 속에 떠나지 않고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며칠후 출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추가 인쇄를 했으니 곧 인터넷 서점에서 구할수 있을거란 얘기였다.
그토록 찾았던 소중한 책이 내 품에 안기게 된날 마치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시는 볼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빠질 뻔 했던 것을 다시 되찾았을 때의 심정이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왜 그리도 이책이 나를 끌어들이는지를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특이한, 새롭고, 놀랍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소설형식으로 보게 된다면 금방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일반소설과는 아주 다른 형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소설이다.
이 책은 47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증언, 서간, 콩트, 묘사, 대화, 아포리즘 등의 독자적인 장르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하면서도 연관성이 유지된다.
설명할수 없는 삶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된 전략이란 점이 당혹스럽게 한다
이 책의 출간 배경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문학상을 겨냥한 많은 작품들이 가을 시즌에 맞춰 출간되는데 이 책은 수상가능성에서 되도록 멀어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1월에 출간해서 상당히 초연해 있다는 것과, '모나코의 피에르 국왕상'의 심사위원인 프랑수아 누리시에는 "훌륭하고 훌륭한 이야기"라는 감탄사와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까지 거머쥐게 된다.
더우기 시상식장에서 그는 입을 다물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자신안에 침잠해 있었고, 기자들의 인터뷰에 '사랑하던 여자의 아들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한남자의 이야기입니다'라고만 말해 기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키냐르의 책에 밑줄을 긋다가 나중에는 밑줄긋는다는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전부가 밑줄을 그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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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간절한 것은 그런 기쁨이 아니라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야. 내가 평생을 바쳐 오직 하나의 육체, 내가 늘 꿈꾸던 포옹의 자세를 취한 육체만을 그렸던 건 그 때문일세.(8)
나는 내 가련한 노래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했네.
파멸의 음악이란 게 있다면, 파멸의 회화 역시 존재할 테니까.(26)
꿈이란 바로 이미지들이야. 더 정확히 말해 꿈이란 심지어 이미지들의 아버지며 주인이네.(40)
솔직히 말해서 하느님이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풍경들과 비견할때 인간이 만든 것들은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41)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고통을 느껴요. 여자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걸요.
이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겐 나쁜 기억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마리)(61)
이유를 대는 것은 사랑을 황폐하게 만드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지.
인간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느낌에만 기뻐하기 때문이라오.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77)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아브라함 반 베르헴) (82-83)
불행한 사람들은 부모들의 분노, 뒤이은 쾌락도 그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분노의 산물이다.(마리)(90)
이런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내리는 비가 색채들을 무화시킨다. 분노는 관능과 마찬가지로 열광적이며 현기증을 일으킨다.(92)
나는 평생동안 질투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어 질투심이 상상력보다 먼저야. 질투심은 시선보다 더 강렬한 환영이지.(119)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128)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매혹적인 하룻밤이 있어. 저녁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잠이 들지. 그들은 마치 어둠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밤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은 추억이네.
그들은 단지 밤의 노리개에 불과해. 그들을 태어나게 했고, 어디서나 무엇에나 그림자를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장면의 노예일 따름이야.(129)
동판을 마주하고 앉으면 비애가 느껴진다. 내게는 한 이미지를 몽상할 시간, 아니 눈앞에 붙잡아 놓고 재생시킬 시간이 더 이상 없다. 내 작품은 다른 곳에 있다. (131)
난, 이제껏 자신을 온통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남자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여자에게서 이 모든 것을 죄다 찾으려는 남자들은 더군다나 보지 못했어. 부재하는 여자들이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어. 상실된 것은 언제나 옳은 거야. 나는 사랑을 더러운 속임수라 부르겠어.(마리)(137-138)
판화가를 번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는 풍요롭고 멋진 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실은 그만 못 하지만 더 강렬한 다른 언어로 바꿔놓은다. 그 강렬함은 그것과 대면하는 자를 즉시 침묵하게 만든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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