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기
안채윤 지음 / 안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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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기]는 그때가 아니면 꿈꾸지 못하고 그때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그때의 아이들, 그때의 나와 그때의 친구들이 남긴 기록이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지나갈 일인데, 마치 그것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져서 숱하게 괴로워했던 그때의 순간들과, 결과적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던 그때의 무수한 선택들.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당장 내일에도 제일 중요한 일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일은 얼마든지 새롭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게 무엇이든 너무 목숨까지 걸어가며 연연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질풍노도의 우리를 어루만져 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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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선생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 못하고 계시잖아요. 근데 무슨 상담을 하겠대요? 선생님이 단순히 제 나이를 지나오셨다는 거만으로는 저를 온전히 이해하실 수 없어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이유는 간단해요. 선생님과 저는 같은 나이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났을 테니까요.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공룡만한 피아노를 별거 아니란 듯이 가볍게 주무르는데! 나 진짜 보는 동안 혼을 다 빼앗긴 기분이야. 사람이 아니라 신을 본 것만 같달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나 아무래도 그녀에게 인생을 걸어야 겠어.”

어떻게?”

갈거야, 그녀의 세계로.”

 

교과서를 제외하곤 책이라 불리는 물건을 취급해 본적이 없었던 내겐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었다. 쌩떽인지 생텍인지로 시작하는 이름보단 발음하기 쉽고, 가브리엘인지 가르시아인지로 시작한느 열두 자의 긴긴 이름보단 기억하기 편하겠구나 생각했던 이름이 이토록 위대했을 줄이야.

 

그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 일평생 사람을 발밑에만 두고 살았을 법한 도도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대던 너는 왜 이렇게 참담하게 죽어 있는 거니? 불쌍하지도 않게.

 

P.118 열여덞이 된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던 3, 뛰어내리려던 내 옷자락을 잡았던 이수호. 자기도 뛰어내리고 싶어서 올라왔으면서 어쩌자고 남의 자살은 방해하고 말았는지 나쁜 놈. 하지만 그 순간 수호의 손은 참 따뜻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이던 그때, 날 향해 사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유일하게 막아주던 사람. 중간고사가 끝나고 수호가 자살에 성공할 줄 알았더라라면. 수호가 나보다 먼저 떠날 줄 알았더라면,

 

조금의 변화도 발전도 없이 그저 한 달 전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을 멈춘 채 오로지 늙어만 가는 인생들이다. 인간은 의지만 있다면 아흔살에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던데 어째서 저들은 고작 마흔 즈음에서 성장이 멈춘 걸까. 그래놓고 우리에겐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고 다그치고 있으니 세상이 이런 모순이 또 없다.

 

긴 푸념 끝에 누나는 결국 다시 울었다. 나는 그 흐느끼는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한 손에 다 잡힐 만큼 종잇장 같은 어깨라니. 부잣집 며느리로 3년간 살다 온 사람이라기엔 가여울 정도로 앙상했다.

도대체 어떤 것일까. 혼자 늙는 게 두려워 누군가와 인생을 결탁했는데, 그 사람이 늙기도 전에 죽어버렸을 때의 심정이란, 속된 말로 내 몫은 챙기기도 전에, 있던 몫만 다 잃고 판이 깨졌을 때 오는 상실감이란 또한 절망감이란.

 

작은 동네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전쟁이라도 난 양 집집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흰 천으로 덮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어린 장남의 차가운 손을 부여잡은 엄마는 오열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신 듯 보였다. 나처럼 준희도 다시 살아날 테지 하는 얼굴로 소처럼 큰 눈을 꿈뻑이기만 하셨다. 아버지 아니에요. 준희는 죽었어요. 저처럼 다시 살아나지 못해요. 준희는 정말 죽었거든요. 나는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방법을 저 독한 자식은 이어이 써먹고야 말았거든요. 그러니까 희망을 버리고 엄마처럼 울어요 차라리.

 

어째서 연우 삼촌도 준희도 꿈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절명해 버리는 걸까. 그러고 보면 무서울 정도로 닮은 두 사람이다. 똑똑하고 바르고 잘생기고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던. 이루고자 하는 꿈을 향해 돌진하는 놀라운 추진력까지. 그저 단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한길만을 꾸역 꾸역 걸었을 뿐인데 왜 다들 이렇게 죽어버리는 거야. 슬퍼서 미치겠잖아.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인다. 우릴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 우릴 열아홉의 인생으로 데려다 줄 버스. 그 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관찰 일기의 첫 문장을 써본다.

나는 곧잘 죽고 싶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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