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콰마린
백가흠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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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잠하고 고요한 아콰마린의 빛으로 함몰되어라.”

 

<마담뺑덕> 소설가 백가흠 10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아콰마린속 여러 인물의 삶에서 드러나듯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일로만 남지 않는다. 언제든 그것은 다시 살아나 현재의 우리를 시시각각 압박해 온다. 과거를 모른 척 덮어두기만 한다면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작가는 우리가 외면해왔던 역사의 아픈 지점을 가리키며 우리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문학의 힘으로, 과거 상처받았던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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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첫 문단은 그렇게 시작된다. 서울 도심, 청계천에서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잘린 왼쪽 손이 발견됐다.

비극은 되살아나고 다시 죽는다. 비극은 현재에 저항하기 위해 부활한다.

 

진짜 손톱이래요. 이런 색깔을 아콰마린이라고 한답니다. 엄지, 검지, 중지의 방향은 제각각이에요. 그런데 이걸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 같답니다. 손이 뻣뻣하게 굳기를 기다렸다가 그런 거 같다고요.

 

김세영은 2월에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는 누가 보낸 것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골똘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케이는 자기가 너무 나약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실망이 컸다. 경찰로서 어떤 열정이나 순수한 정의감마저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아서 자책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전도가 아니라... ,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수라는 종교를 믿어요. 우리는 그 일부분이고요

 

복수의 일부분?”

그래요. 복수.”

 

우리는 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어요. 당신은 둘 중 첫째예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유일한 하나를 만나야 합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할머니를 위해 복수해야지요. 무엇보다 당신이 빼앗긴 인생을 위해서 그녀를 만나야 해요.”

 

그건 아주 개인적인 일입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후회와 반성. 참회의 과정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손을 자른 이유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반장님도 해보세요. 잘라내보면 그 후회나 반성의 존재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없애보면 있었던 게 드러나지요.

 

김세영이 하는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이만이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일가하고 짐작했다. 다른 팀원들은 김세영이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해서 더 큰 의문이 들었다.

 

이번에도 발을 스스로 잘랐을까요? 그것도 두발을 다요?”

 

글쎄요. 모두가 같지는 않으니까. 참회할 게 많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목숨을 내놓아도 죄가 씻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발 정도로 삶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양호한 사람이겠네요.”

꼭 그런 사람처럼 얘기하네요? 그럼, 당신도 구원이나 참회의 의미로 손을 자른 거군요.”

 

케이는 그냐의 문자를 받고서야 아주 오래전 있었던 한 사건이 떠올랐다. 당신에 함께했던 동료를 떠올렸다. 몇몇은 승승장구하며 지금도 요직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몇은 경찰을 그만두고 뭘하며 지내는지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갉아먹었던 이유가 자신의 과오로 얼룩진 과거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나쁜 자식들

 

처음 한쪽을 자를 땐 두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두 번째는 다르지요. 우리도 정말 가능할까, 싶었는데 대단한 의지를 가진 부류들이에요. 저런 의지로 그런 일들을 저질렀으니,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고요. 그게 다예요. 현원씨가 어떤 상실감이나 소외감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는데, 당장은 서로 믿자는 말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조금 쉬었다가 일을 잘 마무리합시다.”

 

케이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벽에 비친 거대한 자신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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