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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이 온다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10
이지애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8월
평점 :
제 2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대상 수상작!
여섯 살 난 아이를 컨테이너에 남겨두고 종적을 감추고 친권을 포기한 아빠를 둔 민서, 민서와 함께 그룹 홈에서 생활한 해서, 솔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셋은 아빠로 대표되는 가족의 안온함을 느끼지 못한 채 자라난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을 늘 남에게 내비치며 가족에 대한 결핍감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세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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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여파인지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아빠의 전화번화가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떻게 아빠 번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는데. 하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건 이렇게 슬프구나.
선생님들은 평소에 무덤덤한데다가 감정 표현이 적고 딱히 큰 사고를 친 적이 없는 내가 약물 치료에 심리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는 진단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심리 치료를 거부했다. 대신 학습치료와 약물치료는 꾸준히 받기로 약속했다.
“나만 아닌 척 하면 사람들은 몰라. 나한테 그만큼 관심도 없어. 거기서 살았던 시간이 내 인생의 오점 같아서 지울 수 있다면 싹 다 지워 버리고 싶은 데 네가 그렇게 그룹홈에 열락하고 지내는 것도 싫어.”
“그럼 나도 언니 인생의 오점이야?”
“그룹홈에서 만난 게 자랑스럽진 않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중에 남친 만나면 그룹홈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 나중 얘기긴 한데 완벽이한테도.”
계란말이는 부드럽고 알맞게 짭조름했고 나물 반찬은 시선하고 들기름 향이 나서 좋았다. 솔 언니는 나물 반찬을 번갈아가며 하나씩 맛보고 있었다. 좋아도 되는 걸까. 맛이 있다는 감각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이상했지만 주인의 마음과 다르게 혀는 제 할 일을 한다.
책임을 묻자면 해서 언니와 완벽이의 아빠가 50대 50일까. 아니면 언니가 임신하지 못하도록 뜯어말릴 책임이 내게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해서 언니의 선택을 말릴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완벽이 아니야. 듣기 싫어.”
언니는 이제 완벽이를 완벽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난리였다. “알았어. 그래서 애는 어쩔 건데.”
언니들과 식사를 마치고 솔 언니에게 돈 봉투까지 쥐여 주고서 집에 돌아온 날 나는 결국 탈이 났다. 입맛이 좋지 않아 적게 먹은 게 얹혀서 그런지 시원하게 게워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 저녁을 꼬박 앓다가 아침이 되어 전날 점심으로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고서야 나는 편안해졌다.
“언니는 나한테 왜 잘해줬어? 내가 불쌍했어? 그거 알아? 나한테 잘해 주다가 뒤통수 치는 게 제일 상처 주는 거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말았어야지. 책임지지도 않을거면서 제멋대로 주는 호의는 악의보다 나쁘다. 오히려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집 안이 적막했다. 다 같이 산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이 적막함을 싫어하게 됐다. 틀어 놓을 티브이도 없어서 나는 그냥 아기 매트에 누워 얼굴을 비비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예정일을 넘기고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완벽이는 오지 않았다. 예정일이 가까워지면서 솔 언니와 나는 밤새 몇 번이고 깨서 언니의 방을 확인했다. 예정일을 넘기고서는 더 심해졌다.
나는 초조해졌다. 내가 완벽이가 오는 걸 두려워하는 걸 알고 완벽이가 늦게 오는 걸 아닐까. 나는 완벽이에게 미안해졌다.
기다리던 완벽이가 왔다. 오랜만에 내린 빗방울에 젖은 흙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슬프고 화가 난다는 것과 완벽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책임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완벽이를 마주하는 일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세상에 나오는 걸 너무 겁내서 미안해. 나는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축하한다고, 애썼다고, 해서 언니와 완벽이에게 진심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