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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5월
평점 :
애덤과 어밀리아는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산간벽지로 주말여행을 떠난다.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는 황량한 마을, 정전 상태를 만든 폭풍과 눈보라, 누군가 그늘 부부가 사는 런던의 집과 똑같이 꾸며놓은 침실 등이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속도감 넘치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심리 스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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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면실인증이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안 그러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테니까.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거나 괴짜로 여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안면실인증은 나에게 프로그램된 영구적 결함일 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알아볼 수 없고, 심지어 아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난 당신이 서랍에 숨겨둔 비밀 시나리오를 보게 되어서 기뻐. 왜 그 작품이 당신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지 이해해. <가위바위보>를 읽다 보니 당신의 영혼을 살짝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허락 없이 봐서 미안하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돼.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다가 수명이 다한 성냥을 떨어뜨린다. 다시 끔찍한 암흑이다. 그때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등 뒤에서.
어밀리아. 어밀리아. 어밀리아.
“속도를 줄이라니까! 내가 다시 한 번 소리쳤지만 어밀리아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액셀을 힘껏 밟는다.
붉은 로브를 입은 여자가 바로 우리 앞에 있다. 여자는 강력한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을 가리지만 몸을 피하지는 않는다. 여자가 차에 부딪치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른다. 앞 유리에 부딪친 여자의 몸이 튕겨나가며 공중으로 솟구친다. 여자가 입고 있는 붉은색 비단 로브가 망토처럼 휘날린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닌 상황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 수도 있다. 결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배우자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산이다. 로빈은 그 커플이 서로 모르는 걸 자신은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로빈이 누군지 모르지만 로빈은 그들이 누군지 안다. 애초에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로빈이니까. 그들도 조만간 그 이류를 알게 될 테지만.
로빈은 헨리의 노트북을 열어 미완성 소설을 읽어 보았다. 음습하고 뒤틀린 헨리 원터의 전형적인 스릴러였다. 로빈은 무서운 대목을 읽다가 케이지 안의 토끼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로빈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토끼가 케이지 안에 갇혀 지내는 게 싫어 예배당 밖으로 내보냈지만 녀석은 멀리 도망치기는커녕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정말 이상하지 않아? 당신 말대로 헨리는 작년 9월에 신간을 냈는데 묘비에는 그 전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게?” “그래서?” “그렇다면 그 책을 다른 사람이 썼다는 뜻 아니야?”
애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이제 애덤은 진실을 알아야 한다.
“웨딩드레스 입은 여자는 내가 아니야.”
당신과 공유하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어. 이미 말했듯이 나는 소설 한편을 완성했고, 또 한편을 썼어. 이번 작품은 아주 흥미진진해. 살짝 귀띔하자면 당신도 등장하는 소설이야. 가위바위보는 선택의 문제야. 난 이미 선택했고, 곧 당신 차례가 올 거야. 모든 걸 잃었을 때 한 가지 좋은 점은 더는 잃을게 없다는 거야
당신이 전 아내가
그제야 처음으로 어밀리아의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아주 잠시지만, 그 얼굴은 낯설고 추하고 어두운 무언가로 변한다. 희번덕대는 어밀리아의 두 눈이 부엌을 사납게 두리번거리다가 식칼을 잡는다. 어밀리아가 번뜩이는 칼을 들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때 도 다른 얼굴이 어밀리아 뒤쪽에서 나타난다. 또 다른 금속이 날이 번뜩인다. 날이 몹시 날카로워 보이는 가위다.
누군가는 헨리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그냥 아무런 종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리 만무하니까. 게다가 헨리는 내년에 신작 <가위바위보>를 출간할 예정이다.
샘은 손전등을 찾아 들고 질척한 땅에서 일어나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비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마치 외국어를 독해하듯이
헨리 원터
한사람의 아버지, 많은 사람의 작가
살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