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
이향규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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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규 작가는 다문화 청소년과 탈북 이주민, 결혼 이주 여성을 돕는 활동가 겸 연구자로 오랫동안 일해 왔다. 현재는 영국에서 남북한 출신의 재영 어린이들이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교육자로, 소수자 소외 문제와 연대의 의미를 탐색하고 기록해 온 저술가이기도 하다.

<사물에 대해 쓰려했지만>은 우리 삶을 채우는 다양한 물건과 장소, 시기를 통로 삼아 우리 사회에서 하지 않아도 모를, 그러나 하면 좋은 일들을 대가 없이 수행해 온 가족, 이웃, 사회 구성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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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주는 위로는 기억에서 온다.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에서 괴팍한 음식 평론가 안톤 이고는 생쥐 요리사 레미가만든 음식 라따뚜이를 먹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엄마가 차려준 식악 앞에 앉은 소년이 된다. 사랑받고 위로받았던 기억이 어른이 된 그를 다시 위로해 준 것이다.

오늘 아침 고사리나물, 미역국, 김치가 나를 위로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되어도, 나는 혼자같이라는 두 바퀴의 균형을 찾느라 종종 휘청댄다.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한다. 혼자여야 하는 일이 있고, 같이 하면 더 좋은 일이 있다. 그러니 어느 한쪽에 너무 마음을 쏟지 말자. 다 혼자 하겠다고 모질어지지도, 늘 같이 하겠다고 애쓰지도 말고, 그저 순한 마음으로 이끄는 대로 살자.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체 그림을 다 보고, 정교한 지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지금 전조등이 비추는 만큼만 겨우 보이는 길을 여행하고 있다. 그래도 이 미지가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뒷마당에 빨래를 말릴 수 있는 지금의 사치를, 당장 누릴 수 없는 사라에게는 조심스럽게,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조심스럽게라도 말하는 것은 누군가 기억 저편에 있는 바람 냄새를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기 때문이고, 또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라이라면 언젠가 마당에서 잘 마른 빨래를 걷을 때, 그 냄새를 놓치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선배는 몸이 허락하는 날이면 늘 산에 간다고 했다. 두 번쯤 동행했다. 어느 봄날,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면서 선배가 말했다.

산은 하루도 같은 풍경이 없어. 계절의 변화는 정말 경이로워, 수리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연이 선배는 하루하루에 감사했다.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그곳이 더 그리워지는 데, 하필이면 곧바로 추석이었다. 내가 아는 한인 이웃들에게 연락해서 추석날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래 봐야 이 작은 도시에 사는 한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 선의 가족dl 온다고 했다. 다행이다. 덕분에 추석날이 여느 수요일이 아니라 미족의 명절이 되겠다. 음식을 나누는 것, 내게는 그것이 명절이다. 잔칫상을 차리리라!

 

우리 골목의 단체 대화방 소개 글은 이렇게 적혀있다.

이 불확실한 시기에 서로를 살펴보는 커뮤니티 그룹.”

다른 말로 이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이 절실히 그립다. 한국에 살 때는 사람 부르는 것이 너무 쉬웠다, 일단은 관리 사무소에서 알아서 해주었고, 전기 기사나 배관공, 보일러 기사, 인테리어 업체를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서비스는 신속하고 저렴했다.

어떤 이는 기계를 고치는 것도 돌봄으로 보았다.

 

기억하는 것은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내 삶의 좌표를 찾고, 내가 누리는 삶을 감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의 흔적이 가까이 있으면 삶이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인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메멘토 모리.”

 

나는 영국에 온 뒤로 늘 내가 이 사회에서 깍두기로 산다고 생각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어 있지 않고, 딱 정해진 사회적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있든 없든 세상 돌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우리는 노는 손이다. 그런데 좋은 점도 있다. 어디에 묶인 게 아니라서 시간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자기 역할을 하느라 바쁠 때, 우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러나 하면 좋은일을 할 수 있다.

 

삶은 기차 여행이다. 대강의 방향을 정했지만, 그렇다고 경로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경유할 수 있다. 어쩌면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함께 타고 있는 이들이 많아 안심이다.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사람으로부터 위안 받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주의를 둘러본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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