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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ㅣ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4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3년 5월
평점 :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17세기 미하일 로마노프부터 20세기 니콜라이 2세까지 명화와 함께 읽어나가는 스토리텔링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러시아의 역사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로마노프 왕족도 어느 왕조와 마찬가지로 투쟁과 반목이 있으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고뇌하는 군주의 모습도 있다. 그 속에 러시아 특유의 잔혹한 피의 역사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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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스부르크 가문의 원류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스위스의 일개 호족이었던 것처럼, 로마노프 가문의 시조도 사실 러시아 태생이 아니다. 14세기 초, 프로이센 땅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 귀족 코발라 가문이 아들 대에서 코시킨 가문으로 성을 바꾸었고, 그 5대손인 로만 유리예비치가 자신의 이름 ‘로만’을 바탕 삼아 로마노프 가문으로 다시 변경했다. 그리고 류리크 왕조 이반의 노제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렇게 드미트리 문제를 침묵하게 만든 보리스는 계획대로 표도르1세 사망 후 차르가 되어 7년 동안 러시아를 움직였다. 표도르 시대를 포함하면 20년 이상 정권을 잡은 셈이지만, 그가 이어받은 이반 뇌조의 농민 정책은 실패했고, 보리스이 만년에 해당하는 17세기는 심각한 기근과 그로써 빈발한 농민 폭동과 함께 막을 열었다.
곳곳에서 포트르는 ‘선진문화’를 접했다. 아이처럼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해부에서부터 각종 공장, 병원, 조폐국, 대학교, 천문대, 의회, 박물관을 시찰하고 무기와 수술 도구, 서적, 회화작품을 사들였으며, 기술자, 의사, 학자, 화가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높은 급여로 고용해 러시아에 초대했다.
결말은 아이러니하다. 그날 밤부터 표트르는 고열에 시달렸고, 지병인 요로결석도 악화되어 결국 2개월 후인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아직 충분히 젊고 씩씩해서 표트르는 자신이나 주위에서도 설마 이렇게 빨리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후계자 지명도 없었다.
금이야 옥이야 자라난 엘리자베타는 이 두 차례에 걸친 모욕을 통해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프랑스 입장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시골 구석에 있는 나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표트르가 고군분투했음에서 러시아는 아직 유럽 선진국의 동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반 6세가 대관식을 올린 지 1년 후인 1741년, 때가 왔다고 생각한 엘리자베타가 마침내 일어섰다. 그녀를 숭배하던 근위대가 아기인 이반 6세와 섭정인 어머니가 자고 있는 침실의문을 난폭하게 두드리고는 두 사람을 생포했다.
18세기 러시아는 여제의 시대였으며, 예카테리나 2세는 로마노프 왕조 최후이자 최고의 위대한 여제였다. 그녀는 표트르 대제의 친딸 엘리자베타보다 훨씬 표트르를 닮은 절대 군주였다. 그래서 표트르와 마찬가지로 후세에서는 그녀를 ‘대제’라고 부른다.
전 황제가 악평이 자자했기에 새 황제는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양각생의 사람들의 새 차르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본인은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몸을 피하며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집중했다. 바로 나폴레옹 대책이다.
나폴레옹이라는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영웅의 출현 자체가 마치 꿈이었던 듯이, 그 영광의 종언 또한 이 그림처럼 어두운 하늘과 얼어붙은 땅 너머로 사라져갔다.
당시의 국민에게는 미움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르2세는 사법제도와 교육제도를 개선해 여성에게도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경찰기구도 개혁했다. 산업 육성을 계속해서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 이 노선을 이어받으며 러시아 근대화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발트함대와 대치한 도치 해이하치로가 이끄는 연합함대는 공격에 앞서 본부에 ‘오늘 날씨 청량, 그러나 파도는 높음’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전보를 쳤다. 그리고 ‘쓰시마 해전’이 시작되어 눈 깜짝할 새 끝났다. 발트함대는 거의 괴멸했다.
러시아는 작은 승리와 큰 패배를 반복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넨베르크의 전투에서 7만명의 사상자와 9만명의 포로가 발생하자 사령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왕권신수설을 믿고 로마노프의 빛나는 가계를 자랑하며 항상 상대방을 끓어 엎드리는 데 익숙한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고 직접 퇴위를 요가 받는 치욕을 받다니 어떤 심정이었을까?
수도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며, 미하일 공은 왕좌에 앉게 되더라도 자신을 경호해줄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사퇴하고 만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4년의 역사는 완전히 종언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