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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평점 :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선정작. 정보라 소설집 <저주토끼> 전면 개정판
2022년 한국 소설장에서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소설가 정보라의 호러/SF/판타지 소설 저주토끼는 냉혹한 현실과 기괴한 환상을 자유자재로 겹쳐, 독자들의 익숙한 일상 속 낯선 공간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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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등은 매우 귀여웠다. 토끼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 부분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았지만, 토끼는 한껏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전등은 할아버지의 친구를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다. 토끼는 단 한번 예외였다.
사장의 손자가 토끼 전등 옆 침대에 누워 천천히 죽어가는 동안에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다. 사장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싸구려 술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던 힘 있는 사람들이 그 힘과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회사는 창립 이후 처음으로 세무조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분문율에는 이유가 있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 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무덤이 새 개’라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저주했던 사장, 사장의 아들, 사장의 손자는 모두 죽었다. 할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냥 집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분노와 슬픔과 원한이 넘치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돈과 권력이 정의이고 폭력이 합리적이자 상식인 사회에서 상처 입고 짓밟힌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찾아오는 마지막 해결책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어느 때보다 끔찍하고 비참한 곳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 덕에 사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차가운 손가락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느다란 목소리에는 자신과 똑같은 불안감이 스며있고, 그녀의 왼손을 단단히 움켜쥔 손가락은 의지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목소리와 손가락을 믿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푹푹 꺼져가는 땅을 한 걸음씩 밟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갔다.
▪흉터
소년은 동굴 안으로 끌려갔다. 이유는 모른다.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아직도 살아 있는지 그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잎, 들풀과 덤불 속에 파묻혀 그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즐거운 나의 집
그녀는 하얀 그림자 아이를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 “엄마하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속삭이며 그녀는 아이의 희끄무레한 이마에 입 맞추었다. 어두운 콘크리트 건물의 검은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렸던 조그만 아이의 흔적이 드디어 찾아낸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그들이 저주에 걸린 이유는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평선 위로부터 태양과 달까지 이르는 허공은 어차피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곳이다. 나의 배는 시간의 시작부터 평화롭게 그 허공을 유랑했다. 황금에 눈이 멀어 먼저 무기를 든 것은 사막의 왕이다.”
▪재회
.... 소원을 빌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면 슬픔이 그리워질 테니까
나는 그의 목을 풀고 이어서 손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