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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와 파도 - 제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우수상 수상작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8
강석희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3월
평점 :
“지켜줄게, 혼자서는 못하지만 우리가 되어, 너를 지켜 줄게.” 세상의 상처에 맞서는 용감한 파도의 물결
제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우수상 수상작인 강석희작가의 장편소설 “꼬리와 파도”
폭력 앞에 무력했던 청소년들이 연대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분투하는 내용의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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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던 해는 1999년이었다. 무경은 그해가 20세기의 마지막 해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20세기의 끝은 2000년이었으니까.
그때 무경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지독하게 메말라 있었다.
무경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지선은 연습을 해 본 것뿐이었다. 뛰어내리는 연습이었다. 진짜 그걸 해야 하는 때가 오면 망설이지 않으려면 연습. 그러니까 지선이 하라는 것은, 죽는 일이었다.
시간은 느리지만 정직하게 흘렀고 J여중의 합숙 마지막 밤이 왔다. 그 밤에 지선과 안창현은 만났다.
지선을 구해준 사람은 전근세였다. 안창현이 지선을 괴롭히던 순간을 늦지 않게 발견했다.
합숙훈련에서 돌아온 후에 지선의 뒤로는 많은 말들이 따라붙었다. 지선에게도 잘못이 있지 않았겠냐고, 여자애가 그 밤에 술을 왜 먹느냐고, 여지를 줬으니 그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지선은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지선을 도와준 것도 전근세였다.
“너 잘못한 거 없다.” 지선은 그 한마디에 기대어 버텼다.
2학기가 시작된 뒤에도 지선이 한참을 학교에 나오지 않자 다시 지저분한 소문이 돌았고 무경은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린 애를 눕혀 놓고 밟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것뿐이라는 사실이 무경을 비참하게 했다.
예찬은 태권도를 시작했다. 무술 중에서 제일 덜 아플 것 같아서였다. 격투를 필수로 하지 않았고 만약 한다고 해도 보호 장비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싸움에 필요한 기술은 하나도 배울 수 없었다. 게다가 함께 운동을 하던 중고등반 수강생들은 모두 2단 이상의 유단자여서 매일 무시를 당했다.
체육관에 무경이 오기 전날,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여자애 하나 새로 올 거다.” 그 말을 들은 검은 띠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검은 띠들의 기분은 ‘내일’이 되었을 때 차게 식었다. 무경이 검은 띠들의 기대에 맞는 ‘여자애’가 아니어서였다. 검은 띠들의 리더 격이었단 황동수는 특히 무경을 싫어했다.
“그냥 동수형이랑 겨루기 붙으면 안되요? 이기는 사람 말대로 하면 되잖아요.”
다들 실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 모두 3단이긴 했지만 성별과 체급을 따지만 황동수가 이기고 끝날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축구로 붙어요.” 무경이 말했다.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잠시 뒤 한 사람이 웃었다. 황동수였다. “그래 너 축구 좀 했다며. 그럼 공평한 거지. 그치?”
황동수는 져주는 게 아니라 진짜 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대0. 그대로 끝이었다. 예찬은 무경의 몸짓에서 아름다운 춤을 본 것 같았다.
“왜 남한테 걱정을 시켜.” 지선은 대답하지 않고 무경을 봤다. 깊이가 사라진 검은 눈동자. 무경은 후회했다. 안 하느니 못한 말이 세상에 너무 많은데, 그걸 자꾸 잊는다. 그럼에도 그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또.
“지선이 강한 애야.” 이한나가 무경의 손에 편지 봉투를 쥐어 주며 말했다. 지선이 무경에게 남긴 것이었다. “......”
“나도 처음엔 오해했던 것 같아. 아픈 사연이 있는 애니까 약할 거라고, 줄곧 무너져 있을 애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니었어. 필요한 건 아파할 시간이었던 것 같아. 지선이는 그 시간을 어떻게든 보냈어. 물론 너도 많이 애썼겠지. 그게 지선이에게 틀림없이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서연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현정에게 말했다. 여러 이유로 이야기가 자주 끊겠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황동수에 관해 말하는 일이었다. 황동수를 지칭해야 할 때 서연은 여러 번 ‘남친’이라고 했다가 ‘아니 전남친’하고 고쳐 말했다. 몇 번 그러면서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새끼라고 하면 어떨까?”
서연은 말라 갔다. 몸에 물기가 빠져 피부가 거칠어졌고 머리카락이 툭툭 끊겼다. 거울을 보면 나쁜 일을 많이 겪은 미래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책망하러 와 있는 듯했다.
이형섭이 예찬에게 졌다는 소식은 검은 띠들 입을 타고 학교에 퍼졌다. 사실 여부를 예찬에게 묻는 애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이형섭에게 시달린 적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냥 재밌는 일을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형섭의 뒤를 따르던 아이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형섭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무경과 예찬과 현정과 서연은 매일 저녁 모였다.
그래서 매일 무엇을 했느냐면, 리본을 만들었다. 네 사람은 그 리본들을 ‘꼬리’라고 불렀다. 현정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일이었다.
“귀엽다, 우리 꼬리들!” 현정이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파도 같네.” 무경이 말했다. 겨울바람을 따라 나란히 흔들리는 파란 꼬리들이 달빛 아래 너울대는 파도처럼 보였다.
“유등 축제 학생 전시장에 이상한 게 있던데요.”
꼬리는 정말로 파도가 됐다.
k여고의 한지 등 아래에 달린 파란색 리본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었다. 그 아름다움에 이끌린 사람들이 리본을 자세히 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거기에 적힌 글들도 읽게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충격과 경악으로 굳었다.
모두가 자신의 편인 것은 아니었지만, 서연은 끝까지 싸워 보기로 했다. 현정과 무경과 예찬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나도 지켜줄게. 그런 마음으로.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무경이었다. 무경은 아이들에게 계속 말해도 된다고, 더 말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