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사료편찬관
마엘 르누아르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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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사료편찬관이라는 흥미로운 캐릭터를 통해 모로코의 근현대사를 대담하게 펼쳐낸 소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1940~70년대 모로코의 독특한 정치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우여곡절이 많은 모로코 근현대사를 소설이라는 멋진 장치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펼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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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의 총애를 받은 적도 잃은 적도 많았다. 어느 경우는 대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왕궁 혁명은 국제 여론이 우리나라의 엘리트층이나 국민의 의지에 따라 벌어진 일로 믿을 수 있게끔 조작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희생하려던 유력자들, 당시 식민 통치 당국의 비호를 받으면서 식민 통치가 무한히 연장되길 바라던 권문세가들의 작품이었다.

 

더없이 힘든 고난의 시기에도 전혀 흔들림 없었던 그 충정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하고 싶어 하시며, 그래서 폐하께서는 숙고 끝에 더없이 소중한 계획들에 나를 참여시키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아부성 짙은 단속적인 언어는 좋은 전조가 전혀 아니었다.

 

왕이 프랑스의 고전적인 저자들, 특히 파스칼의 말을 즐겨 인용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은 파스칼을 특히 편애하여 종종 그가 쓰지 않는 문장들을 그의 문장인 양 인용하곤 했다. 백성은 그의 그런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고서, 프랑스인들에게 보란 듯이 내세울 많나 박식한 군주를 가졌음을 자랑스러워했다.

 

왕국의 사료편찬관의 직무는 다양했다. 당연하지만 어떤 명확한 규정에 따라 규제받는 일이 아니었다.

내 업무의 중요한 한 부분은 왕의 문서 작성과 연설문 준비를 돕는 것이었는데,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왕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해야 하는 일은 거의 매일 있었다.

 

왕에게서 그런 찬사를 들은 나는 어쩌면 이 불운한 저녁이 뜻밖에도 내게 실총보다 은총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그날 이후 나의 모든 임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되었지만, 왕은 두 번 다시 내게 평소 그를 보필하는 그 이야기꾼들 대신 나서 달라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왕이라고 선언하고 몸을 일으켰다.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얻어 터지고 끌려가.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개처럼 총살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너의 왕이다. 이제 나를 개처럼 쏴죽일 건가? 그러자 그 젊은 군인은

폐하, 우리는 폐하를 구출하러 왔습니다!”

 

왕의 안위에 대한 불안이 가시자. 어쩌면 이제 나 자신의 운명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 앞에서 내가 한 그 짧은 연출,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의 역할을 빼앗은 그 행동이 과연 사태의 열기가 가라않고 나서도 계속 왕의 머릿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소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은 내게 일종의 휴식을 보장했다. 왕국의 일부 고관들이 골치 아픈 문제들로 괴로워할 때 나는 상대적으로 편안했다. 만연한 부정축제를 왕이라고 모를 리 없었지만, 왕은 그런 일을 눈감아 주었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자 했다. 확실히 우리는 소문의 나라에 살고 있다. 소문의 여왕인 나라, 왕조차 그 신하인 나라에 말이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민이기에 우리 발아래 그런 감옥이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왕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를 기리며 왕조의 장수를 기념하는 바로 그날 왕조가 무너졌다. 나는 나 혼자 남은 왕의 눈대 높은 곳에서, 그 끔찍한 결과를 바라보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왕의 사료편찬관이라는 직책이 더는 장관으로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달래려는 자리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이야기를 듣자. 다시 한 번 나는 짓밟힌 나 자신의 야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는 정말 다른 얘기, 특히 베르사 유궁과 축제에 관한 얘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운명은 엄훅하면서도 감미로웠다. 몰라이 이스마엘의 기념식은 열리지 않을 테지만, 그의 진학 행위들에 대한 모방은 시작되었다. 그런 사건들은 어쩌면 내 일이 될지도 몰랐다. 이제부터는 은총과 실총 상태가 번갈아 교체되는 게 아니라 하나로 굳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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