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용한 흡혈마을 ㅣ 네오픽션 ON시리즈 8
성요셉 지음 / 네오픽션 / 2023년 2월
평점 :
한국영상위원회, 인천영상위원회, 부산영상위원회, 제주영상문화산업진흥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정한 지원작 <흡혈 라이프> 원작
조용하던 흡혈마을에 인간이 들어왔다!
인간이 되고 싶은 흡혈귀들과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인간 남매의 좌충우돌 현생 탈출기
130년 동안 외부와 차단된 미지의 섬, 자귀도, 그곳에서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간직한 흡혈귀들이 살고 있다. 희주와 이루의 등장으로 평화롭던 나날의 길고 긴 평화가 깨진다.
------
조선시대의 자귀도는 황 대감의 별장이 있던 섬으로 십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동백항 인근에 살던 황 대감은 식솔들과 자귀도에 잠시 머물다가 흡혈귀가 되었다.
“그래, 마을에 변고가 생겨 이리 흡혈귀가 되었으나, 더는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귀도에 갇힌 지 130년이 흘렀네, 그간 나라가 몇 번이나 바뀌고 세상 또한 변천하지 않았는가...”
보윤은 조선에서 좌포청 종사관을 지냈다. 일찍이 관직에 오른 만큼 그의 활약은 눈부셨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한 번에 받았다. 좋은 집안의 외아들이며 수려한 외모에 능력까지 출중하니 사윗감으로 최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흡혈귀가 되어 자귀도에 격리된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희주는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사체업자에게 빌린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 잠을 줄이고 일을 해야 했다. 시급을 조금이라도 높게 받기 위해 주로 야간 일을 맡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도 빚 갚는 속도보다 이자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다 보니 원금의 몇 배를 이자로 갚아야 했다.
희주의 결심은 확고했다. 할머니가 말한 자귀도가 위험해봤자 장기를 빼간다는 사채업자보다 무섭겠나 싶었다. 어느 쪽에서든 두려움은 희주를 삼키려 혀를 날름거렸다. 희주에게는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다.
희주는 오랜만에 걱정 대신 행복한 상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햇빛을 막았다. 들어올린 팔이 희주 머리 옆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 아래로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드러난 뼛조각이 햇빛에 반짝이고 있음을 희주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질퍽한 소똥과 씨름하다가 발라당 넘어지기 일쑤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순전히 뻥이었다. 희주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이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할머니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깨똥어미가 두 손으로 희주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스물두살 아가씨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얼굴이 고와 손을 고운 줄 알았더만, 뭔 고생을 이리했대. 많이 힘들었죠?” 개똥어미가 희주의 손을 어루만지며 토닥였다. 희주는 순간 울컥했다. 깨똥어미의 위로가 희주의 마음을 온기로 채워주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흡혈귀 얘기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을에 병을 옮겼거나 화재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할머니는 분명 보물이 있다고 했어. 설마 소설 같은 할아버지 글로 빚 갚는다고 하셨겠어? 어쩌면 할아버지 집에 가면 뭔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요상한 맛도... 사람들도... 왜 자꾸 정이 드는 데. 그래, 이 사람들이 흡혈귀면 나를 살려뒀을 리가 없잖아.” 희주는 할머니와 엄마가 자귀도를 그리워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섬사람들의 투박한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엽전 꾸러미였다. 씻어내지 못했던 금은보화의 환상이 사라졌다. 낙망한 희주는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냈다.
“자세히 보시오. 금전이오.” 희주가 멈칫하더니 반색해서 엽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금화였다.
희주는 남은 글의 앞뒤를 유추해보았다. ‘담피의 특별한 능력’이라면 앞서 말한 엄마의 괴력일 것이다. ‘흡혈귀를 죽인’과 ‘섬사람들을 위험’부분은 담피의 괴력이 흡혈귀를 죽이는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같았다.
그간 희주의 삶은 사슬로 묶여 깊은 바다에 갇혀 있었다. 행복을 꿈꾸는 사람조차 부러움의 대상일 만큼 희망이 없는 지옥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으로 살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