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우리는 우리학교 상상 도서관
문경민 지음, 이소영 그림 / 우리학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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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작가 문경민의 신작 누구보다 뜨겁고 시린 계절을 보낸 열세 살 우리들의 이야기

 

부당해고를 당한 아빠, 하루하루 버티는 엄마, 힘을 갖고 싶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나, 나보다 더 힘든데도 씩씩해서 오히려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친구, 태연히 얼굴색 바꿔 가며 자신을 휘두르는 다른 친구.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를 구하는 건 결국 진심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려는 올곧은 마음임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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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와 보리는 같은 유치원을 나왔다 부모님들끼리도 잘 알고 지냈고, 작년 여름에는 두 집이 어울려 바닷가 펜션에서 이틀을 보내기도 했다. 루미 아빠와 보리 아바는 직장도 같았다. 두 분 모두 삼인 기업이라는 큰 회사에서 전자 제품을 파는 일을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루미 아빠는 회사를 나왔고 보리 아빠는 남았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람을 위합니다. 속이 욱신거렸다. 아빠는 사람이 아니었나. 저 회사가 아빠에게 저지른 짓이 떠올랐다.

 

아빠는 희망퇴직을 거부했다. 아빠는 사무실 구석의 동그란 책상으로 내몰려서 온종일 앉아만 있는 생활을 한 달이나 버텨야 했다. 아무도 아빠에게 일다운 일을 주지 않았다.

 

손을 흔들던 루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미도 활짝 웃었다, 저 친구들처럼.

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보리는 루미의 웃는 표정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자기 안에서 울린 목소리가 섬뜩했다.

 

부당해고 중단하라! 희망퇴직? 절망 퇴직! 우리를 배신한 삼인!

현수막과 팻말의 문구들은 처량했다.

 

보리와 세희는 묘하게 잘 어울렸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마음에 뒤엉켰다. 보리의 친구는 자신이었다. 보리의 친구는 어딘가 미심쩍고 종잡을 수 없는 세희가 아니라 늘 보리를 걱정하는 자신이어야 했다.

 

루미를 괴롭히라는 미션이 떠올랐고 또 다시 코웃음이 나왔다 중학생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 하는 짓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로 웃긴 애들이었으나 잘나가는 언니 오빠들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보리는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너희 엄마 돌아가셨잖아. 그리고 새엄마 들어온 거잖아. 그런데 왜 아무 문제가 없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너희 아빠, 우리아빠랑 같은 회사였잖아. 희망퇴직도 했잖아. 직업도 없잖아. 그런데 왜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네가 그렇게 잘났어?”

 

그러는 너는. 너는 왜 네 생각만 해? 네 기분만 중요해?” “?” “우리 어마는 나랑 아빠를 지키려고 병과 싸웠어. 엄마가 너무 안돼서, 힘들어 하는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엄마 너무 힘들면 치료 그만해도 된다고, 내가 그랬어.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루미는 자근자근 짓밟는 투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엄마도 우리 엄마야. 세상 최고로 좋은 엄마야. 아빠랑 내가, 산하랑 단하가 사랑하는 엄마라고. 네가 지금 한 짓이 뭔지 알아? 넌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두고 함부로 말했어. 어떻게 감히.”

 

세희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고 들어서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온기가 가셨다. 부드럽게 올라갔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아주머니는 쌀쌀맞은 얼굴로 물었다. “세희가 그러던?”

 

내가 자기 엄마가 아니래?” 매서운 목소리에 루미는 목이 움츠러들었다.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다. “혹시 자기 엄마가 희귀병으로 식물인간이 됐다고, 그런 소리를 하던?”

 

보리는 자신과 세희가 저질렀던 일들을 워드프로세서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은근히 다른 아이들을 따돌렸던 일, 괴롭혔던 일, 애들에게서 교묘하게 돈을 뜯어 낸 일 등등을 모조리 기록했다.

 

지금... 자수 같은 거 하는 거니?” 보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루미는 웃음을 터뜨리며 보리의 손을 잡았다. 루미의 손은 촉촉하고 따뜻했다. 보리도 루미가 괜찮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용서 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그날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생각하면 꽤 오랫동안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이 또 생기겠지만, 보다 나은 모습으로 헤쳐 나 갈수 있을 것 같았다. 흔들리는 건 이미 해 봤으므로, 보리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녕. 나의 열세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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