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인생수업
백혜선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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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천재들을 넋 놓고 지켜보며 그들을 한 없이 부러워하는 한명의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고 한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무궁무진한 반복은 완전무결한 결과를 넘어 자유화된 표현으로까지 나아간다. 연습과 연마의 끝에는 표현을 내 뜻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자유가 찾아온다. 이 음악을 어떻게 치고 싶다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음악 자체가 된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연주자는 무대에서 이 자유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아니, 오히려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기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대 위에서 느끼는 예술가의 자유로움이 결국 정확한 반복 연습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다. 즉흥성이 정확성에 빚을 지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피아노와 함께 산 지 어언 오십년. 내 연습실에서는 오늘도 이 지겨운 반복 연습이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피아노는 역시 얄밉고 얄궂은 친구였다. 몇 달을 치지 않았더니 아예 몇 년 전의 실력으로 돌아간 듯 했다. ------- 이 얼마나 좌절을 부르는 상황인가.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모든 피아니스트는 좌절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백혜선이 누구인가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다.

 

선생님은 늘 말하곤 했다. “사람은 자기가 언어로 알고 있는 것만큼만 표현하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네. 정확한 단어가 아니라 그냥 그림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희미한 표현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가진 하나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어떻게든 좋은 것을 발견해 내려는 욕구와 재주를 조금이나마 지녔다는 점이다. 선생님에게 그토록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는 이 수업의 좋은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정말 나의 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주어짐 앞에서 나 개인의 미약함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저 흐름에 종속되어 표류하듯 인생을 살겠다는 뜻도 아님을 밝히고 싶다. 나의 음악 인생은 또 하나, 삶이란 죽는 날까지 자신을 계발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순진하다 할지도 모르겠으나 연주자로서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연주자는 자기 연마를 통해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아무런 진전도 거두지 못했지만 이렇게나 열심히 연습했고 그러니 내일은 한 발 나아가게 되리라. 하며 헛되어 보이는 시간에 기어코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진실 된 연주는 통하는 법이고 피아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나는 더욱 혼신을 다했다. 아니, 단 한순간도 혼신을 다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거기서도 더 나아간 듯했다. 이렇게 치고 죽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내 영혼의 호소를 담은 연주였다.

 

두 아들딸을 하버드에 보낸 엄마’. 주변에서도 어떻게 하나도 아닌 두 남매를 하버드에 보냈냐며 비결을 많이 물어보고 언론 인터뷰를 할 일도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 내가 하버드에 보낸게 아니라 아들딸이 알아서 들어간것이기 때문이다.

 

안온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 이것이 정년 나의 삶인가 하고 느낄 때면, 그 각성을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 -----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이 편안한 생활을 유지할 것인지, 불안에 몸을 던지더라도 성실하게 내 삶을 실험할 것인지.

 

음악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음악보다 덜 중요한 나를 받아들였고 취약한 자신을 전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결과였다.

 

내가 오를 무대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지만 아직은 쉽게 물러서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나이는 쉰여덟이다. 한 예술가가 정말로 자기의 세계를 걷고 있는가를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나이다.

 

나의 연주를 찾아 주는 청중들과 함께, 그리고 순수히 음악에 헌신하는 후배와 제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음악을 하면서, 이 거대한 산을 끝없이 등정하는 기분으로 음악에 헌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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