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죄
윤재성 지음 / 새움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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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센 손아귀가 뺨을 감싸 쥐었다. 남자는 단단한 나무껍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아.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거든 그래야 해.”

평생 자아 없이 사육돼온 가축에겐 다소 벅찬 당부였다.

 

신임 검사들도 저렇게 사육되었다. 조직 안에서 못 견디는 애들은 낙오하고, 예쁜 애들은 뽑혀 가고.

 

더 말하기도 짜증이 나서 전화를 끊었다. 죽은 고래를 둘러싸고 상어들이 해안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피 냄새는 상어뿐만 아닌 다른 것을 불러온다. 깊은 바다 속, 심해 밑에 잠긴 거대한 것....

 

꽉 쥔 주먹에 거머리 같은 핏줄이 솟았다. 지켜야 할 것 앞에서, 그는 검사로도 인간으로도 무력했다.

 

싸우는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사모님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황경미는 대답 없이 아이를 끌어안았다. 순조는 조직이 죽인 남자의 가족을 두고 일어섰다. “아빠가 없어도 보육원보다는 나을 겁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은 실제로 많았다. 귀머거리 장님 흉내를 내는 것, 공짜 술상을 받는 것, 닭 잡던 칼이 소 잡는 칼 될 때가지 충성스럽게 기다리는 것.... ..................

할 거면 제대로 찌르라고 해, 어설프게 굴지 말고.” “....?” “좀 빨리 가지.” 검사장이 말하자 기사는 속도를 높였다. 다행히 오늘 몫의 쪽지 시험은 끝난 모양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들어올 시간에 비닐하우스로 도망가 잠든 적이 있었다. 손전등 불빛에 깨어나자 핏발이 곤도선 흰자위가 보였다.

나가고 싶지? 소원대로 해주마.’ 머리카락을 잡혀 끌려간 밭 한복판에는 구덩이가 있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머리만 빼고 묻어버린 아버지는 삽을 던지고 가버렸다.

생매장의 기억은 공포스러우면서도 안온했다.

 

김 선배는 그래서 죽은 겁니다. 불의가 정의보다 무거운 줄을 몰라서, 망나니 주제에 능력보다 큰 칼을 휘두르려다가.” 그녀는 옛 연인을 향한 모욕에 화를 내야 할지, 동의를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표정이었다. 순조는 재차 회유에 나섰다.

 

검사님, 그러다 진짜로 잘리세요. 위원회에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세요?” “해임되겠죠. 면직이나 정직일 수 도 있고.” “그런데 왜...” “평생 입을 수 있는 옷은 없어요. 언젠가는 해져서 안이 보이게 됩니다.”

 

물 밑은 안온했다. 위를 올려보다 저녁놀빛 거품들이 흐릿한 형광등 밑을 떠다녔다.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산호초 틈에 몸을 누이고 잠들 날을 기다리는 고래가 된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으스스하게 돌아갔다. 그건 무립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죠. 할 줄 알았던 순조는 입을 꾹 닫은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미도는 저 모습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 냈다. 연수원 모의재판에서 상대를 깨부수기 직전에 늘 짖던 표정이었다.

 

손쓸 수 없는 원한이, 멀어서 무용한 정의가, 이틀 뒤로 다가온 동생의 생일이, 물 아래에서 보았던 빛과 함께 떠내려 왔다. 손바닥의 가시를 빼지 않고 방치했던 이는 그녀 자신이었다.

 

사시 수석이라더니, 그 꼴로도 당당하구먼.” “근본 없는 출생이 어디 가겠습니까? 흙탕물에서 자란 미꾸라지 들이 다 그렇죠.”

 

아버지는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내였다. 허기를 견디는 동안 석양이 내려앉아 세계를 불태웠다.

벌거벗은 허수아비처럼 지는 해를 멍하니 바다보다 시력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손상된 망막은 천천히 회복됐지만 심장 부근의 상실감은 영영 메워지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 남아 있던 애정과 양심, 죄책감 따위였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여 깨닫게 되었다.

 

폭력의 씨앗은 짓밟힘으로써 싹의 틔웠다. 잔디로 덮인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순조는 선글라스를 썼다. 숲을 무너뜨릴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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