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영어생활자로 살아남는 법 - 발음에 집착하는 당신이 알아야 할 일터의 언어, 태도에 관하여
백애리 지음 / 그래도봄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때 나는 강한 여성이 되기로 했고 몸부림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곧장 서랍을 열어 깊숙이 넣어둔 여권을 펼쳐 만료일을 확인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인생부터 해결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어라는 공공의 적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구직 마켓에서 보잘것없는 나를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뭐라도 붙들고 원망해야 했다. 계속 영어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굳게 믿었다. 나는 영어만 잘하면 인생이 술술 풀릴 줄 알았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면서 뜻하지 않게 사과할 일도 생기고 마음이 미어지는 경험도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기 위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시작한 출발 지점, 말이 하나씩 통한 게 신기하다고 좋아하던 기특한 기억을 붙드는 게 낫지 않을까. 난 늘고 있어, 그걸 믿자.

 

도착 첫날의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를 계산하지 않고 의심 없이, 경계심도 없이 환대해준 선한 사마리아인들 속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존재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렬히 행동하는 건강하고 젊은 에너지에 둘러싸여 생활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생활에도 은근한 지지가 되었다.

 

미국만 영어를 쓰는 게 아닌데 어째서 그동안 다양성에 노출되지 않은 채 한쪽에만 매몰되어 있었던가. 미국 드라마를 보며 최대한 미국 원어민의 발음을 모사하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이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글로벌 기업이나 국제조직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인데 전혀 대비를 해 놓지 못했다니, 준비는커녕 필요를 감지하지도 못했다. 미리 연습할 시간도 없이 이렇게 닥쳐서야 알게 되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영어 공부를 위해 이것저것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연습법을 실습한 것뿐인데 어느새 나는 내 목소리를 듣는 올바른 경청 자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소재에서 시작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 그걸 매개로 영어와 접점이 만들어지고 세계가 확장한다.

 

유럽연합EU 안에서 교육체계가 호환이 되니 인접 국가에 가서 유학하는 게 쉬었고 이웃 나라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국제기구에 대한 접근성이 월등히 높았다. 실제 국제기구 통계를 보면 유럽의 참여도가 가장 놓다. ................. 하지만 나는 어땠나.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심지어 두 개로 쪼개져 국경을 넘으면 곧장 월북인데? 이런 조건을 하나씩 따지고 보면 고립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새삼스레 서러운 일이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등감을 어떤 방식으로 다룰지 고민하면 콤플렉스가 언젠가 나를 도울 날이 올 거라고, 그 첫 번째는 나의 열등감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구직을 위해서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약점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상황을 여러 차례 구술하다보니 초라한 내 처지가 명료하게 와닿았다. 슬슬 현실을 알아차리는 대신 창피한 게 없어졌다.

 

유럽에서 일하고 싶어요.’

이제 나의 소망이 저 나무에 걸려있다. 이 메모는 나 자신에게 말하는 집요한 암시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사는 것이 내 목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는 프로페셔널로 일해보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빛을 기다리며 무급 인턴쉽을 지속하는 추운 겨울을 생존한 건지도 모르겠다. 성장할 기회를 주는 사람들 옆에서 발을 맞추며,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는 결국 밝은 여름과 어두운 겨울이라는 시간을 모두 손에 쥔 현재의 내 몫이었다.

 

여전히 내 영어는 부족하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누구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출발할 때는 몰랐다. 나의 회복탄력성은 얼마나 탄성이 있는지. 마음에 근육이 붙고 힘이 생기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는지. 주변에서 나누어주는 지혜를 흡수하는 자세와 경계가 사라진 글로벌한 세계에서 고쳐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걸 끝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 갈망을 현실로 바꾸고 싶어 여권을 갱신한 날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여정은 끝이 없다. 지속할 뿐이다. 막막한 마음에지지 말자는 다짐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