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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범상치 않은 표지디자인과 제목, 그리고 지은이가 현직 부장판사라는 타이틀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현직 부장판사가 써내려 갔다는 부분에서 어떤 법률에 관련된 지식을 핸디북 형식으로 간편하게 펴볼 수 있게 만들었을 거라고 짐작하였을 뿐, 판사와 소설가를 같이 연관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법정활극이라니, 점점 이 책을 곁에 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 관한 이야기니 휴직 중인 나에게 법원은 어려운 장소라기 보다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친숙한 장소였기에 마치 일상을 접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독서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대감에 이 책을 펴들게 되었다.
일단 이 책을 읽고 난 직후 느낀 첫 소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라는 것이다. 박차오름이라는 캐릭터가 무거운 소재를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도록 적절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정말 이런 캐릭터의 여자 판사가 법원 내에 실존할까 하는 요소만이 판타지인가 싶게 유일하게 ‘소설’임을 자각하게 해줄 뿐 이 책에 담긴 맛깔난 소재와 이야깃거리, 캐릭터들은 실제 법원 내의 일상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한 컷, 한 컷 슬라이드 영상처럼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적 이슈들을 각종 아재개그와 말랑말랑한 방식으로 써내려간 분이 부장판사님이라는 게 너무 놀라웠다.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 ‘판사’님들을 거리적으로 가깝게 모셔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유머감각을 겸비한 부장판사님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루할 틈이 없이 헛소리 하지 않고 활자들이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듯 읽게 된다. 원래 독서를 하는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이 책에서 각 다루고 있는 소재가 가볍지 않고 계속 생각할 화두를 던져주고 있음에도 어떻게 이렇게 쭉쭉 읽히는 건지 놀랍기만 하다. 세 주인공들과 이야기의 소재가 잘 어우러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이 소설에서 지은이는 매우 섬세하고 또 친절하다. 곳곳에서 그런 부분들을 느낄 수 있고 독자와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분의 재판 스타일 또한 그렇지 않을까 감히 추정해본다. 각 ‘부’가 끝날 때마다 정말 에필로그에 기록된 대로 무표정한 판사가 아닌 ‘판사’라는 한 개인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판사의 일’이라는 페이지를 제공한다. 소설을 읽으며 다소 무거운 사회적 이슈들에 빠져 깊이 생각하게 될 때 쉼터 같은 존재로 다가오는 페이지다. 어떻게 보면 정말 치밀하고 전략적인 소설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내가 제일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성공의 길’이라는 페이지에서 수석 부장판사가 올곧고 바른 말, 바른 생각만 하는 임바른 판사에게 세상사에 대해 깊이 있는 충고를 하는 마지막 단락이 매우 인상 깊었다. 아직까지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에게 치이기도 하고, 또 나보다 높은 분들만 있는 법원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려운 곳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수석 부장판사님이 임바른 판사에게 하는 충고는 내게 정신적 멘토 같은 역할을 해주어서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게 되었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 부분은 조금 아쉽게 다가왔다. 물론 소설의 맥락적인 부분에서 임바른 판사가 조금 더 유연성 있고 둥글게 살아가고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부장판사님의 진심어린 충고였겠지만 사실 한창 피끓는 청춘인 임바른 판사 나이대의 뜨거움을 식히기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위로는 그리 달갑지 않다. 결국 나중에 세월이 흐른 이후에라야 모를까 우리 청춘들은 어른들의 아프니까 청춘이니 이 시기를 견디라는, 혹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식의 위로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지쳐있다. 그만큼 지금 사회적 배경이 강퍅하고 팍팍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제7부의 국민참여재판 부분은 어렵기만 한 재판의 과정과 국민참여재판의 시행 취지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해서 인상 깊었다. 사건 내용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살인’이어서 긴장감도 느껴졌는데 마치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내가 배심원의 한 명인 것처럼 등장인물의 상황에 맞춰 다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예비 배심원 후보자인 1번 노인의 마지막 반전 역시 의외이긴 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편향되지 않고 어떤 잣대를 두고 내린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시 식스센스급 대반전은 세 주인공의 기이한 운명. 마지막 결말에서 그들이 과거에 첫 만남을 가지게 되는 이 코믹적인 장면은 나로 하여금 훈훈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법정과 관련된 소재를 소설로 읽은 것은 미야베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이후 두 번째였다. 그때는 소설의 방대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사실 너무 무겁고 어두운 소재 거리에 역시 장소와 소재의 한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미스 함무라비’는 그런 한계와 고정관념을 아주 유쾌, 상쾌, 통쾌하게 타파한 법정활극 드라마이다. 한 번 손에 쥐면 블랙홀처럼 빠져드는 마력의 소설. 나는 별 다섯 개에 자신있게 별 다섯 개를 모두 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