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대해 무언가 끼적거리고자 하는 지금도 나에겐 어떤 불편함 같은 게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몇몇의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모종의 감정과 유사한 종류일 것이다. 말하자면 실천가, 운동가들 앞에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이나 숙연함, 혹은 부채의식이 그러한 불편함의 정체일 것이다. 서준식의 글을 속독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글 속엔 그가 살아온 이력이, 그가 몸담고 있는 인권운동이, 그의 올곧은 실천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입과 머리로써만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손과 발로써, 결국 자신의 몸으로써 진보를 '증명하는' 사람에게 엄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글은 따라서 경건함으로 읽어내려야 한다. 또박또박 천천히 그의 글을, 아니 그가 글로써 대신 이야기하는 '실천'을 읽어내려야 한다. 읽음의 과정에서 만약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짐을 느낀다면, 그 정도의 불편함은 '고맙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불편함을 느끼는 것 말고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아무것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인간의 권리'라는 보편타당한 명제는 지독히도 오염된 말이 되고야 말았다. 제국은 자신의 노골적 패권주의를 치장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인권'을 차용한다. 고용허가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이란 결코 한국인의 그것과 등가가 될 수 없다. 장애인들의 인권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무엇'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어떤 시혜의 논리가 개입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인권이 자신이 태생하던 당시에 지녔던 한정적 의미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인권이 '남자'와 '부르주아'들만의 것이었다면, 지금의 인권 역시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만의 인권으로 한정되어 있다. 응당 '보편타당'한 것이어야 할 인권은 '자본의 논리'와 '정치의 논리'에 의해 침범당하고 능욕당하고 있다. 인권을 강간하는 세상에서 '가치중립적 인권'을 말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추상적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일. 따라서 서준식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인간의 권리'를 구현하기 위해 '계급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치중립적이란 말은 듣기에는 좋은 '당의'일지 모르지만, 그 당의를 걷어내면 현실의 냉혹한 역학관계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의 문제에 육박하지 않고', '변혁을 꿈꾸지 않'는 인권이 반쪽짜리 인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권은 계급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성'에 접근할 수 있고, 변혁에의 희망은 '인권'을 고민함으로써 '구체적 인간'에 대한 감수성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원칙주의자'로서의 서준식이 내가 가진 천박한 '실용주의'와 때때로 충돌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한총련 간부들에게 감옥에 감으로써 권력과 당당하게 맞대응할 것을 주문할 때, 또 지난 월드컵 시기의 '붉은 악마' 현상을 두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라 질타할 때... 난 불편하다. 그가 말하는 '원칙'들은 분명 존경받아야 마땅한 것이지만, 그의 원칙을 제 삶의 원칙으로 고스란히 전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우리들의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원칙주의자'라는 말이 '낭만주의자'나 '비현실주의자'와 혼용되고 있는 요즘, 그에게 '원칙주의'라는 말을 부여하기가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적 뉘앙스를 제거하고 말한다면, 그의 원칙주의는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지침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소중하고 엄숙한 것이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개개인들의 구체적 삶의 표본이 되기에는 너무 무겁고 커다란 것 같다. 결국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받았던 불편함이란 서준식이라는 한 '활동가' 앞에서 느끼는 부채의식,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원칙을 (실천적으로) 추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나약함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책은, 반어적인 의미에서,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 한국정치: 이론과 역사 1945-2003
손호철 지음 / 사회평론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고급스런 좌파 정치학 교과서라 보면 되겠다. 물론 이 때의 정치학이라 함은, 한정적인 의미로서 ‘한국 정치(사)’를 가리킨다. 한국현대사 전체를 훑는 그의 분석이 기반하고 있는 이론은 정통적인 맑스주의와 알튀세의 중층결정론, 그리고 풀란차스의 국가론과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그 너비가 상당하다. 그의 미덕은 이런 이론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절하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데 있다.
또 그러한 고민은 매우 엄격하고 촘촘한 논리에 의해 수행되는데, 이를테면 그는 외국 이론의 개념이 자의적으로 해석․인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개념의 외연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킨다. 한 예로, 그는 ‘파시즘’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각 나라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종별적 특징’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물적 토대, 즉 ‘중위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상부구조’로서 파시즘을 이해할 것을 강조한다.

몇 년 전, <현대한국의 사상흐름>이라는 책이 한 일본학자에 의해 출간된 적이 있다. 재일조선인 2세인 윤건차 교수의 저작인데, 그는 거기서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을 이념적으로 분류한 일명 ‘지식인 지도’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왼쪽의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부터 가장 오른쪽의 ‘극우반동’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국 유명 지식인들을 하나하나 그 지도 속에 배치시켰다. 그의 지식인 지도에 따르면 손호철 교수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 가운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로 분류가 된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xxx주의자’란 꼬리표를 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로 빠져버릴 위험성이 있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한 서술적 개념이 아니라 엄밀한 분석적 개념으로 쓰일 경우, 그 용어의 사용은 보다 깊은 신중함을 요구한다. 짧은 논문을 제외하고는 손호철 교수가 출간한 책을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느낌으로는 윤건차 교수의 분류는 비교적 적절한 것 같다.

단지 거기에 약간의 윤색을 가한다면, 손호철 교수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와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 그 양자 사이의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 정치학 방법론의 바람직한 방향을 언급할 때, 그는 사회현상의 ‘중층결정’을 강조하면서 ‘경제결정론’과 ‘정치결정론’의 양 편향을 두루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관주의적 편향을 경계하려는 그의 의식적 노력은 세계체제와 1국적 동학의 문제, 구조와 행위의 문제, 사실과 이론의 문제, 분석수준의 문제 등 그간의 사회과학이 안고 있던 고질적인 고민거리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구체화된다. 물론 이러한 구체화는 단순한 언명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열거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은 말 그대로 ‘문제의식’ 차원에 머무는 일일 뿐이다. 실제 분석에 있어 그러한 변증법적 접근이 어떻게 ‘이론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적 문제일 것이다.

그의 논문 가운데서 이러한 변증법적 이론화가 잘 구현된 부분은 박정희의 유신체제 성립과 그것의 몰락배경을 분석하는 대목인 것 같다. 또한 그의 ‘전통적 맑스주의’적 입장이 잘 반영된 대목은 미국 대외정책에 관한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을 미국 신좌파 이론가들의 ‘자본 분파’ 개념을 동원해 비판한 부분이다.

커밍스는 해방 3년사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이 기본적으로 ‘미국 정책기관들 간의 관료적 갈등’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진단하고 그것을 ‘국제주의’와 ‘민족주의(고립주의)’라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상의 대립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손호철 교수는 이러한 입장이 그 이데올로기들이 기반하는 물적 토대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은 ‘생산자업자들의 이해관계’와 ‘금융자본과 국제 석유재벌들의 이해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망매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글을 읽는 건 나에게 있어 하나의 쾌락이다. 내게 '읽음의 희열'이 무엇인지 알려준 이는 바로 이 사람이고, 내가 닮고 싶은 글쓰기의 전범(典範)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고종석의 몫이다. 세계시민주의와 개인주의를 꿈꾸는 이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글을 통해 자신의 지향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가 가진 '압도적' 지식과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문체는, 한국의 진정한 우파를 고르는 데 날 주저케 하지 않는다. 한국의 우파는, 그리고 자유주의는 고종석에 의해 지탱된다.

때때로 그의 지향과 나의 지향이 충돌하는 건, 기본적으로 나라는 인간이 그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가 '자유주의'라는 넓디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나보다 얼마간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사실도 또다른 원인이 될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위치의 차이'가 때때로 그와 나의 충돌을 일으키며, 그 충돌에 날 당혹케 만든다.

이를테면 복거일을 자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삼는 그가, 그 스승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부여잡은 나머지, 스승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조절하는 듯한 인상을 줄 때, 난 곤혹스럽다. 또 그가 롤즈와 포퍼를 이야기하며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을 경계하면서도, 때때로 시장에 대한 평가에서 앞의 두 사람보다 뒤의 두 사람에 보다 친근한 모습을 보일 때, 난 당혹스럽다.

게다가 그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며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할 때, 그 주창 속엔 세계 정치 지형 속의 권력 관계가 세심히 배려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나의 이런 '당혹감'들은, 결국 그를 닮고 싶으면서도 닮을 수 없는 내 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망매>는 그의 단편들을 묶은 소설집이다. 고종석의 산문보다는 울림이 좀 덜한 것 같지만, 어찌됐건 이 소설집 역시 잘 읽혀지는 편이다.'제망매'라는 제목은 '고종석'이라는 세 음절이 주는 울림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전자가 '옛스러운' 이미지를 풍긴다면, '고종석'은 내게 있어 '세련됨'과 '근대','자유주의'의 상징이다.

책 속의 작품들 가운데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찬기파랑'과 '사십세'인데, '찬기파랑'이 현대사에 대한 고종석의 치밀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단편이라면,'사십세'는 사십세에 진입하는 한 남성 화자가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내면의식을 세심히 드러내고 있다. 이 남성 화자가 이른바 '첩의 아들'이라는 것.

이것은 소외된 '개인'에 대한 개인주의자 고종석의 관심과 연민을 나타낸다. 고종석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가 전라도인, 혼혈아, 서자 등과 같이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살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과 일정부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다음과 같은 문구는,어찌보면 고종석 자신의 체험적 고백에 가깝다.

'사실 광주 사건 이후에,너무나 불공평하게도,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딴 지역 사람들의 편견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관찰일 것이다. 그게 세상이다. 누군가가 당한 불행은, 누군가가 당한 참화는, 그 불행과 참화를 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대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대체로 어떤 운명의 징표로서,어떤 낙인으로서 작용하기 쉽다. 인간의 진화는,아직,고작,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