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를 닮아서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반수연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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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를 닮아서-

조금 일찍 퇴근해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란 말을 들으며 반수연 작가의 '나는 바다를 닮아서' 산문집을 꺼내 식탁에 올렸다. 어제 낮부터 저녁까지 한번에 읽어버린 책이다. 작가의 이민 생활과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얘기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일상에서 글줄기를 찾아내는 반수연 작가의 탁월한 관찰력에도 감탄했지만 에세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탄탄한 문장의 힘, 필력에도 많이 놀랐다.

먼저 문장이 짧으며 경쾌하고 단단하다. 작가의 탁월한 필력은 사소한 사건에도 독자를 킥킥거리게 만들거나 짠한 감정의 숲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톡톡 튀는 문장이 끌고가는 대로 끌려가다 보면(아니 끌려갈 수밖에 없는) 작가의 생각의 속도에 독자는 함께 공명하게 된다. 공명의 리듬을 타는 순간 웃고, 울고, 감탄하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내게 있어 공명의 순간은 불과 몇 페이지 읽지 않아서였다. 캐나다에서 고사리를 채취하는 작가를 따라가다 캐나다 경찰을 경계했고, 에잇! 그깟 벌금 내고 말지 호연지기를 실현했고, 결국엔 일체유심조 '거기 고사리가 있으니 나는 캘 뿐'까지 가게 됐다. 소제목 또한 능청스럽게 '번뇌의 숲'이다. 제목에 기가 눌려 약간 무겁게 접근했던 나의 순진함과 작가의 능청이 만나 그렇게 '나는 바다를 닮아서'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98년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어디 이민이 쉬운 결정인가? 낯선 나라에서 한 가정이 뿌리 내린다는 건, 12월 추운 어느 날 장미 삽목을 하고 지켜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가 없어도 안 되고, 온도가 떨어져도 안 되고 습도도 맞아야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일은 해야 하고, 돈은 없는데 집은 구해야 하고,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을 작가는 담담하게가 아닌 두근거리게 얘기한다. 독자가 꼭 같은 환경을 맞딱뜨린 것처럼.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떠올렸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과 반수연 작가의 글이 주는 느낌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의 기억을 바탕에 둔 전개가 겹쳐서일 수도 있고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문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장은 분명 다른 부분이 있었다. 반수연 작가의 문장은 단단하고 경쾌한 느낌이 있다.

왜 문장이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단단하다는 것은 뭐고, 단단함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졌다. 잠시 생각하며 글을 읽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작가의 성장 과정을 보며 이내 단단함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시장통에서 가장 만만한 선술집 과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는 취객을 향해 '고마 캭 죽이삔다'라고 강단있게 소리쳤던 어린 소녀, 언니 대신 전봇대 두꺼비집에 올라가 '얼굴에 말고 후레쉬 똑바로 비치라' 소리치며 퓨즈를 갈아 동네를 밝혔던 어린 작가의 강단이 문장을 단단해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삶도 함께 단단해졌을 것이다.

단단함이 주는 효과는 크다. 슬픔과 고단함조차도 단단한 언어는 경쾌하게 넘어선다.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지도 않고 이야기의 서사 또한 휘~ 다른 무대로 훌쩍 옮겨버린다.

어머니의 장례에서 큰언니의 기독교식 추모와 작은언니의 불교식 장례가 충돌할 때 '요즘은 하이브리드가 대세인가'란 단 한 문장으로 작가는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이야기 서사 또한 다른 삶을 살아왔을 언니, 오빠의 이별의 방식을 존중하고 더 나가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흐름으로 이동한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했지만 단단한 이 한마디 이후 옮겨간 이야기의 서사는 언니, 오빠 뿐만 아니라 독자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살아 온 힘이고 버텨 낸 힘이다.

삽목했던 장미가 뿌리를 내리고 몇 해 지나면 꽃을 피운다. 꽃은 해마다 핀다. 지난했던 작가의 가정도 꽃을 피웠다. 꽃은 엄마, 아빠보다 크고 화려해 가끔 낯설기도 하지만 낯선 땅에 뿌리를 깊게 박은 장미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반쯤 읽다가 작가를 검색했고, 2/3 정도 읽었을 때 반수연 작가가 먼저 출간했다는 '통영'을 주문했다. 지금도 반수연 작가의 글과 공명하고 있으니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혼 초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 '조금만 지나면 좋아질 거야, 쫌만 참아 줘'란 말을 아내에게 자주했다. 그럴 때마다 말이란 '더 이상 곪지 말라고 툭 하고 던지는 최초의 항생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바다를 닮아서' 이야기 속에는 고단하고 힘든 이민 가족의 일상을 곪지 않게 지켜냈던 탄탄한 언어의 항생제가 가득 들어있다.

반수연 작가의 문장을 통해 고단한 일상을 지켰냈던 역설의 위트를 꼭! 경험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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