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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해석전문가 - 교유서가 소설
부희령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으로 순서는 이러하다.
1. 콘도르는 날아가고
2. 구름해석전문가
3. 완벽한 집
4. 만주
5. 귀가
6.내 가슴은 돌처럼 차갑고 단단하다
모두 각각 다른 단편 소설이지만 ‘구름해석전문가’와 ‘완벽한 집’은 연작소설의 느낌을 주었다.
가장 독특하게 느꼈던 단편은 ‘귀가’였다. 내가 현재 있는 위치를 소제목으로 달아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단편 뭔가 무섭기도 하고 분위기가 묘해서 읽는 동안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책의 전체적인 총평을 하자면 조금은 어렵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1️⃣[콘도르는 날아가고]
p.12/ 소설책을 덮을 때마다 나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그 소년에 대한 사랑은 그를 의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내 시야에서 사라질까 초조해 하기도 하고 그 모습을 들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내 첫 번째 맹세가 깨졌다. 그 후에 언니의 수첩을 훔쳐 처음으로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비밀 일기 같은 글을 언니들에게 들켜 놀림을 받기도 했다. (놀림이라기엔 비난과도 가까웠지만)
담장을 넘다 다친 내 앞에 한 남자 어른이 나타나 날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남자 어른과 소년의 명확한 관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년을 지하실에서 지내게 하는 것을 보니 아빠는 아닌 듯했다. 어느날 그날의 호의를 기억한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차를 탔다가 납득할 수 없는 손길에 의해 아물지 않을 상처가 생기고 만다. 그 상처로 인해 나의 두 번째 맹세까지 깨지고야 말았다.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 도착한 곳은 그의 집이었다. 그 집에 불을 지를 계획이었다. 그런 나에게 소년이 나타나 내 손바닥 위에 차가운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녹슬고 휘었으나 제법 큰 대못이었다. 그것으로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남긴 채 소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대못을 잡았던 오른손에 불그스름한 녹물 자국이 손바닥에 남아있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다짐했던 나의 맹세가 깨졌던 그 순간들이 꿈이 아니었구나,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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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름해석전문가]
p.44/ 아, 그랬나? 내가 구름전문가는 아니거든요.
p.59/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경은 안개라고 여기던 희뿌연 덩어리들이 구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경은 달빛과 뒤섞인 구름 속에 서 있었다. 산을 보려면 구름 아래에 있어서도 안되고, 구름 속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위에 있어야 해요. 기댈 데 없이 허술한 상윤의 말이 떠올랐다. 이경은 어둠 속에서 혼자 웃었다.
-> 선우와 헤어진 후 그가 준 열리지도 않는 노트북을 두고 오지 못한 채 이경은 포카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헤어질 때 그 노트북을 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여행을 와서도 그 비밀번호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곳에서 만난 진상,상운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라운딩을 하게 된 이경은 그 노트북을 가지고 갈지 말지 고민한다. 어차피 열리지도 않는 노트북이니 쓸모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두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그녀는 생각이 바뀌었다.
마지막 순간 노트북을 두고 오기로 한 판단은 현명했다고
그 노트북을 들고 왔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버렸을 거라고
이경은 이제 선우가 쓴 선우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경이 쓴 이경의 이야기를 읽고자 할 것이다.
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라볼 것이다.
여기서도 보이는 산을 굳이 굳이 올라가 구름 위에서 본다.
이경의 변화를 보니 남들이 볼 땐 굳이 싶은 일들도 어쩌면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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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4/ 금희는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니, 아직은 모두 좋은 사람인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인연으로 쌓인 업을 스스로 풀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미움받지 않게 해달라고, 간신히 빌 수 있을 뿐이다. 금희는 문득 윤의 글을 떠올렸다. 소망이 소중한 이유는 노력한다고 해서 미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p.102/ 운명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기척없이 숨죽이고 있다가 돌연 저돌적이고 막강한 물성을 과시하며 나타났다. 일단 한 번 그 존재를 드러내고 나면 주인공이 지치고 황폐해질 때까지, 그래서 삶이든 운명이든, 그 무엇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될 때까지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굴었다.
p. 155/ 이럴 수가 있나. 집이라는 건, 언제나 굳건하게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린아이인 나는 어른의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p.163/ ”사람이 하는 일이 저울의 눈금으로 잴 수 있을 만큼 선악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건가? 의도와 행위도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야”
p.172/ 모두들 젊었을 때는 하고 싶고,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뒤로 미루잖아.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다는 느낌이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면 미래는 더이상 빛나지 않고 과거가 찬란해지기 시작하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의 절반은 미래를 위해 삶을 유보하고, 나머지 절반은 과거의 삶을 후회하며 사는 것 같아.
* 출판사 서포터즈로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