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큐레이션 리커버) 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큐레이션 리커버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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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김약국의 딸들』을 다시 읽었다. 거의 20여년 만인데 책을 읽는 동안 줄거리가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잊고 있던 이름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김약국의 딸들』은 박경리 작가가 1962년 발표한 장편소설로, 경남 통영을 배경으로 김약국 집안의 몰락과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원경에서부터 근경으로 다가간다. 마치 드론 카메라가 촬영하듯 구한말 통영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대대로 약국을 운영한 봉제, 봉룡 형제의 이야기와 비상을 먹고 자결한 봉룡의 처 숙정의 슬픈 사연이 소개된다.


‘김약국’이라 불린 성수는 봉룡의 하나뿐인 아들로 일찌감치 부모를 잃고 큰집에서 자라났다. 아들이 없던 봉제는 몸이 약한 딸 연순을 시집보내고 조카에게 집안 살림과 약국을 맡긴다. 김약국은 한실댁과 결혼해 첫 아들을 낳지만 아이가 죽고 내리 딸 다섯을 얻는다. 큰딸 용숙은 남편이 죽고 혼자 아들을 키운다. 둘째 용빈은 서울에서 공부하는 똑똑한 신여성, 셋째 용란은 용모가 뛰어나고, 넷째 용옥은 인물이 없는 대신 차분하고 야무지다. 막내 용혜는 아직 어리다. 다섯 딸들의 개성이 하나같이 다 다르다.


이 소설은 격변의 시대와 사회 구조 속에 한 집안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 잘 보여준다. 김약국은 부모의 흉사를 딛고 약국과 가문을 지켜온 인물이다. 땅에서 소작을 얻고 큰 어장도 가지고 있는데다 배를 구입해 새로운 사업도 확장한다. 매사 점잖고 경우 바르지만 시대 변화와 가족 내부의 갈등 앞에서는 우유부단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갈등이 생기면 입을 꾹 닫고 그 상황을 외면해 버리는 회피형 인물이다. 그 결과 집안에 드리운 불행을 끝끝내 막지 못한다. 몰락해 가는 전통적 가장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제목이 『김약국의 딸들』인 만큼 다섯 딸들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다.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났는데 캐릭터가 다 다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자유연애나 사랑, 사회 활동을 꿈꾸기에 현실적 제약이 많았던 여성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차면 적당한 혼처를 찾아 결혼해야 하고 유교적 관습에 따라 시가와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이 당연하다. 다섯 딸들 중 욕망에 충실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용란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용숙, 용란에게 혀를 차다가도 장녀로서 책임감이 있는 용숙, 시대의 희생양인 용란의 이면을 보면 마냥 미워할 수 없다. 딸들 중에서 넷째 용옥이 가장 안타까웠다. 용란을 마음에 두었던 남편 기두에게 내내 사랑받지 못했고 남편이 비을 비운 때 시아버지 서영감에게 욕을 당한다.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막내 용혜는 상대적으로 언니들에 비해 서사가 많지 않지만 언니들과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될 것이 암시된다.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박경리 작가가 보여주는 서사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쭉쭉 읽힌다. 생동하는 문장에서 인물들이 저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의 말맛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오래 전 가본 통영의 바닷바람과 소금기 어린 공기가 생각나면서 그러고 보니 박경리 문학관에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하동집’에도 한번 들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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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두루미는 방송 중 한울림 생태환경 그림책
생태지평연구소 지음, 정김소리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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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겨울 철새다. 하지만 환경 변화로 많은 철새들이 그렇듯 두루미 역시 장거리 비행이 더 이상 쉽지 않다고 한다. 멸종위기종 1급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 그림책은 멀리 러시아에서 1,500여 킬로미터를 날아와 2주 만에 힘겹게 도착한 두루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루미가 1인 방송을 한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덕분에 두루미의 생태에 대해 공감과 이해가 더욱 깊어진다.

이들의 여정은 목숨 건 모험의 연속이다. 비행기와 충돌 위험은 물론 오는 동안 쉴 곳도, 먹을 것도 부족하다. 무사히 우리나라에 도착한다고 해서 안전할까. 도로와 빌딩이 늘어나면서 두루미들이 쉴 수 있는 논과 갯벌, 습지가 점점 사라지는데다 논에 떨어진 곡식과 곤충을 먹고 농약에 중독되어 죽는 두루미도 많다. 몇몇 개체는 전선에 걸려 날개를 잃기도 한다. 이대로 두루미가 멸종되지 않도록 반성과 책임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참새나 까치처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기에 두루미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달 파주에서 독수리 먹이주기 봉사활동을 하고 왔는데 파주 건너 재두루미 습지가 있는 김포 이야기가 나왔다. 한강을 건너 파주에서도 재두루미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턴가 날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논밭 주위로 잘 닦인 도로와 공장 건물, 아울렛 등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두루미 같은 철새들이 살 곳을 잃고 멸종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에 대해 적어도 먼저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알아야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든 말든 할 것이기에. 최근 산황산 골프장 이슈로 산새 먹이주기 활동도 하고 온 터라 이 그림책이 주는 메시지가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인간은 도대체 자연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서. 새들이 살 수 없는 세상은 인간에게도 위험할 것이다.

방송 중이었던 두루미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을 부탁한다고 마무리한다. 흔한 유튜버들의 고정 멘트처럼 너무 무겁지 않게 던진 마무리지만 그림책을 덮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잊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당부처럼 들린다. 다음 예고편이 “속보! 두루미 채널이 강제 종료?”라는 것을 보면 개체 수 보호와 인간들의 노력이 이들의 생존에 지금 당장 시급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내년에는 철원에 두루미를 보러 가야겠다.

#멸종위기두루미는방송중
#생태지평연구소 #정김소리_그림
#한울림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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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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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긴 잠에서 깨다』가 출간되었다. 조세이 탄광에서 이어진 강제노동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는데 앞장선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고 정병호 교수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다. 부제는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으로 ‘공공인류학’은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공공 영역에서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그 해결을 위해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던 정병호 교수는 일본 어린이집들을 비교하는 현장 조사 연구를 위해 홋카이도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골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도노히라 스님을 만나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 현장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노히라 스님은 10년째 유골들을 수습해 불교식으로 화장해왔고 역사 현장의 훼손을 우려한 정병호 교수는 여러 전문가와 학생들을 꾸려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1997년 여름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고된 발굴 작업을 함께 하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서로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감정이 상한 적도 있지만 개개인의 인식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또 한편으로 언어와 지역, 성별, 그리고 마음의 벽을 넘어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며 연대하는 과정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이런 시민 사회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나 외교의 영역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관심, 지역 주민들의 공감에 힘입어 좋은 분위기에서 유골 발굴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2006년 아사지노 유골 발굴 당시 우익의 방해와 정치적 논란에 흔들리는 아픔도 있었다. 슈마리나이 유골 발굴이 언론에 보도되고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문제가 이슈가 되자 삿포로별원에서 조선인 유골 101구를 합골 처리해버린 일도 있었다. 한국의 여러 정부 기관이나 단체의 형식적이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경험하기도 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기조가 달라져 유골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했다.

p.137
기억과 애도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희생자를 외면하고 정치화하게 된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유골 발굴이 단지 과거의 흔적을 파내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기억 투쟁이 돼야 한다”(p.175)는 생각을 바탕으로 강제노동 희생자들이 끌려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유골 봉환을 하는 과정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학계는 물론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에서 마음을 모았다. 유골 안치에 난항을 겪던 중 고 박원순 시장 덕분에 ‘70년만의 귀향 묘역’을 만든 에피소드도 있었다. 박근혜와 아베에 이어 윤석열과 기시다 정권이 드러낸 ‘식민주의적 힘(p.213)’과 권력의 담합을 우려하기도 했다.

정병호 교수와 여러 사람들의 활동은 1997년 슈마리나이 유골 발굴에서 그치지 않았다. 홋카이도에 머무는 동안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에 대한 가슴 아픈 역사를 알게 되었고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틈새’에서 차별 받으면서 살아온 자이니치의 현실을 목도한 뒤 한일 양국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힌 ‘동아시아 공동 워크샵’을 출범시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를 바로 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현재는 물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며 이해관계를 넘어 연대를 실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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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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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는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중학생 미리내와 집안일 로봇 아미쿠의 우정을 그린다. 소설의 배경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상용화된 가까운 미래. 회사 업무로 바쁜 엄마가 아미쿠 3.1 최신 버전 체험단에 당첨된 것이 발단이 된다.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내기는커녕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인 아미쿠. 하지만 엄마는 배우면 배울수록 똑똑해진다면서 미리내에게 잘 가르쳐보라고 조언한다.

시크하게 보여도 미리내는 ‘관심’이 필요한 아이다. 엄마는 얼굴 볼 틈도 없이 바쁘고 프로그램 개발자였던 아빠는 인공지능에게 밀려 퇴직한 뒤 제주도의 당근 농장에서 일한다. 엄마아빠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혹시 이혼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대화조차 해본 친구가 없다. 그런 미리내의 유일한 즐거움은 연재 사이트에 ‘도로시’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올리는 것이다.

조회 수가 나오지 않아 풀이 죽어 있던 미리내는 아미쿠 덕분에 소설 제목도 바꾸고 점점 독자들의 반응을 얻게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반 친구들에 의해 미리내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소설을 쓴다는 혹평을 듣는다. 이 에피소드는 독자들에게도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창작의 윤리에 대해 되묻게 한다. 어디까지가 미리내가 쓴 것이고 어디까지가 아미쿠의 몫일까. 그 사이에서 미리내는 혼란을 느낀다.

이런 혼란은 애꿎은 분풀이로 이어지고 아미쿠를 교환 신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계수나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아미쿠가 리퍼브되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과연 미리내는 아미쿠와 다시 함께할 수 있을까. 미리내에게 실패한 로봇으로 남고 싶지 않다던 아미쿠처럼 미리내 역시 실패를 딛고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 성장 과정을 응원하게 되었다.

미리내와 아미쿠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점이 흥미로웠다. ‘마음’에 대해 고민하고 자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아미쿠는 미리내가 학교 친구 누구와도 할 수 없던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본래 기능인 집안일은 형편없지만 미리내에게 딱 필요한 유사 인격 모드를 탑재한 아미쿠는 어쩌면 인간관계에 갈증을 느끼고 각자의 분야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판타지처럼 묘사된다.

소설 쓰기는 독자의 읽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첫 번째 독자가 되어 방향성을 제시해준 아미쿠가 아니었다면 미리내의 소설은 외로운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엄마아빠의 상이한 생각처럼 앞으로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또 하루가 다르게 가변화되는 흐름 속에 소설 쓰기와 같은 예술의 가치는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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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아리랑 한울림 작은별 그림책
정란희 지음, 양상용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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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강제징용 노동자의 비극. 역사 속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특별한 관심이 없는 이상 교과서에 단 몇 줄로 서술된 문장과 뉴스 화면만으로 얼마나 많은 개개인의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당장 나의 생활과 관련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백, 몇 천 숫자가 아닌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누군가의 이야기로 전달될 때 그것은 곧 가까운 친구, 이웃처럼 실제 존재한 ‘사람’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사할린이 어디인지 지도를 찾아보았다. 동해의 북쪽, 홋카이도 바로 위쪽에 위치한 러시아 극동의 섬.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했고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해 그곳에 남게 되었다. 위치조차 잘 알지 못했던 낯선 땅. 아마 그림책 『사할린 아리랑』의 주인공 ‘흥만’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흥만은 말이 ‘모집’이지 일본 순사들에 의해 강제징용 당해 먼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가족과의 생이별이었다.

하루 12시간, 때로 15시간이 넘도록 어두운 탄광에서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며 일을 했고 열악한 작업 환경, 추위와 굶주림, 감시와 매질 등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죽어갔다. 흥만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고향의 노래인 아리랑을 부르며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이 된 뒤 일본은 조선인들을 학살했고 흥만을 비롯한 4만 3천 명의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고향에 가고 싶어 미쳐 죽었지.”

『사할린 아리랑』은 머리가 하얗게 센 흥만의 사연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남의 땅에서 평생을 살아야했던 혹독한 시간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올해로 광복 80주년. 그림책을 보면서 우리말, 우리글을 쓰며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역사를 두고두고 잊지 않아야한다는 걸,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극우의 역사 왜곡에 맞서 ‘기억 전쟁’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걸 다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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