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코끼리가 있다. 좋아하는 체리 하나 잡아챌 힘도 남아있지 않은 코끼리 앞에 어디선가 코요테 한 마리가 나타난다. 코끼리는 코요테의 존재가 반갑지 않다. 어떤 목적으로 주변을 맴도는지 뻔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코끼리에게 코요테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코끼리가 코끼리답게 산 것처럼 자신은 코요테답게 사는 것뿐이라고. 죽음은 두렵다. 나의 죽음도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도 상상할 수 없다. 슬픔을 겁내서 덜 사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코끼리 역시 곧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몹시 슬퍼한다. 하지만 코요테의 생각은 다르다. 이 세상에 ‘끝’이란 없으며 모든 생명은 순환한다는 것을 차분히 들려준다. 코끼리를 위로하기 위한 어쭙잖은 개똥철학이 아니라 그동안 세상을 떠돌며 보고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다. 자신을 놀린다고 화를 내던 코끼리도 어느새 코요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비밀로 가득하고 죽고 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 코끼리는 마침내 덤덤히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코끼리가 죽기 전 코요테를 만나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슬픔에 몸부림쳤을지 모른다. 김상욱 교수의 책 『떨림과 울림』을 보면 우주에서 죽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모든 생명은 원자로 돌아가게 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원자는 영원불멸하니 지나치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림책에서 말하는 ‘비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나답게’ 채워가며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겠다.
p.188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형의 세상을 엿보았고 결국 알게 되었다. 그곳에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터치 한 번이면 사라질 가상 세계.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누군가의 진심이 있다면 그곳은 현실보다 더 소중한 공간이 될지 모른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형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선우혁이 메타버스 ‘가우디’를 통해 12년 전 죽은 형 선우진의 흔적을 발견하며 아무도 몰랐던 진실을 찾는 이야기다. 메타버스가 상용화되어 각자의 아바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대화하고 싶은 인물의 음성 파일과 메시지를 입력해 가상 음성 친구를 만드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과학이 발전한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선우혁은 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다섯 살 때 형이 죽었기 때문이다. 형의 학교생활은 어땠을지 궁금해 하며 ‘프프’라는 가상 음성 친구 앱을 통해 형의 음성을 복원해 대화를 나누고 형의 아이디로 메타버스에 들어가 ‘가우디’에 접속한다. 가우디는 오래 전 유행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집짓기 게임이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형이 만든 정원과 2층짜리 하얀 벽돌집이 남아 있었고 12년 동안 그곳을 가꿔온 ‘곰솔’이라는 아바타가 나타나 형의 아바타인 ‘JIN’을 반겨 주었다. 곰솔은 과연 누구일까?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열 개의 편지, 10년 동안 학교를 다닌 학생이 있다는 괴담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열세 살 차이지만 형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선우혁을 보며 부모님과 교감 선생님, 형 친구인 정수민은 고등학교 때 세상을 떠난 선우진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형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선우혁은 누구도 형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우디에 만든 공간과 공유친구 곰솔이 형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추리해간다. 열쇠는 선우혁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열 개의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곰솔’이며 선우진과 같은 반 여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편지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온점’을 건드리고 미술 견학 수행평가를 함께하면서 풋풋한 감정을 나누었던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귤 때문에 겨울이 즐거웠던 곰솔이 두 번 다시 귤을 먹지 못하게 된 이유가 마음 아팠다. 자신 앞에 죽은 선우진과 똑같은 얼굴로 나타난 선우혁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비밀을 품고 가상 세계 속에 머물렀던 곰솔의 감정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마지막 문단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긴 시간을 건너 손에 쥐어진 귤이 무척이나 달고 새콤할 것이기에. 그 귤을 건넨 사람은 슬픔에 매몰되지 말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삶을 살아가라는 선우진의 메시지일 것이므로. 이 책을 읽고 제주에서 귤 한 상자를 구입했다. 앞으로 귤을 볼 때마다 JIN과 곰솔이 지나온 계절을 오래도록 떠올릴 것 같다.
『위풍당당 여우꼬리』 4권의 부제는 ‘붉은 여우의 속삭임’이다. 1권이 나왔을 때 4학년이었던 단미가 어느덧 5학년이 되었고 단짝 친구 루미, 단미의 비밀을 알고 있는 황지안과 반이 갈렸다. 재이가 전학 간 뒤 또 다른 미스터리를 품은 ‘도래아’ 캐릭터가 추가되고 지금껏 나온 꼬리 중 가장 기운이 센 네 번째 꼬리와의 만남이 그려진다. 이번 책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원하는 또래 여자아이의 마음이 솔직하게 표현된다. 그런 마음은 누구나 한번쯤 느끼는 것이라 공감하게 되었다. 단미는 안 그래도 새 학기 적응이 힘든데 당분간 집에서 지내게 된 사촌동생 아진이가 엄마아빠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마음을 터놓을 곳이 없다. 다른 반이 된 루미는 새 친구들을 사귀어 들떠 있고 단미가 짝사랑하는 민재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시호와 더 친하게 지내는 것 같다. 그뿐인가. 자신이 반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선유의 그림 실력에 위축되고 만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는 네 번째 꼬리를 불러낸다. 네 번째 꼬리는 자신을 ‘질투’라고 소개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꼬불꼬불한 빨강 머리, 매섭게 빛나는 눈빛을 가진 네 번째 꼬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라며 단미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한다. 질투라는 감정을 붉은 여우에 비유한 것이 흥미롭다. 붉은 여우의 속삭임대로 행동하던 단미가 엉망이 된 모든 것을 바로잡고 자기 자신은 물론 친구들, 붉은 여우와 화해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꼬리가 나타나 마음의 방향을 알려주는 대목이 좋았는데 다양한 꼬리의 조언을 새기면서 단단한 어른이 되는 거겠지. p.163마음속이 질투로 가득 차서 견딜 수 없이 화끈화끈해졌다고 해도 해결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네가 가고자 하는 곳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 보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샘을 내고 있다면, 너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꿔 봐. 너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노력한다면 누구든 널 인정하고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을 거야. 구미호의 후손은 아니지만 아마 사춘기가 시작된 많은 여자아이들이 저마다의 꼬리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딸과 같은 나이라선지 단미를 딸처럼, 혹은 딸 친구처럼 지켜보고 응원하게 된다. 다음 권에서는 어떤 꼬리가 새롭게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민재도 단미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언젠가 사랑의 꼬리도 나오게 되지 않을까? 황지안이 어떻게 단미의 정체를 아는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도래아는 과연 누구인지 풀릴 떡밥이 많다. 이거 누가 넷플릭스 어린이 영화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책 #책추천 #책리뷰 #책읽기 #어린이책 #장편동화 #위풍당당여우꼬리 #붉은여우의속삭임 #여우꼬리 #손원평 #만물상 #창비 #창비어린이책
모처럼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났어요. 수채화 느낌의 표지에 마음이 일렁입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뒤돌아선 주인공에게 과연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나’는 아침마다 강가를 걷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강물을 들여다볼 때도 있지요. 아마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곧 수업이 시작될 텐데 ‘나’가 강물 속으로 뛰어 들거든요. 여기에서부터 굉장히 흥미진진해집니다. 여전히 강가에 서 있는 ‘나’와 강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서로 다른 존재일까요? 그때부터 ‘나’는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나’가 신경이 쓰입니다. 어쩌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계속 그 생각뿐입니다. 강물은 겉으로 보면 잔잔하지만 수없이 많은 물결이 부딪치고 흐르지요. ‘나’는 강물 속의 ‘나’에게 돌아오라 말합니다. 일상의 루틴을 지키며 학교에 가야 하는 ‘나’도, 가끔은 일탈하고 싶은 ‘나’도 모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일 뿐입니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알 것 같아요. 청소년 시절 나도 그랬으니까요. 모순된 여러 개의 자아를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웠거든요. 다행입니다. 강물 속의 ‘나’를 바라보는 세 번째 ‘나’가 강물로 풍덩 뛰어듭니다. 강물에서 ‘나’는 실컷 웃고 자유롭습니다. 나만의 고유한 시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나’에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강물 밖에서는 마음껏 웃어본 적이 없다는 ‘나’의 고백이 안타까워요.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강물은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 세계가 아닐까요. 이 그림책은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읽어야 고요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침내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마음이 편해집니다.#그림책 #100세그림책 #성인그림책 #나는흐른다 #송미경 #장선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