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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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소멸의 대상들과 그 소멸의 징후들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시적 화자는 그래서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 존재하거나 (「오래된 서적」)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라는 탄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정서는 '불안'과 '공포'에서 기인하는데「위험한 가계·1969」에서 보이는 화자의 유년은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라고 말하는 아프고 무능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 곁에서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는 어머니,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누이, 그리고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는 또 다른 누이로 결정될 수 있는, 암울하고 출구를 알 수 없는 깊은 고통의 세계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시집의 도처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무기력하고 불안한 풍경들이다.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를 가진 아버지는 '추악하게'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노인들」)에서와 같이 적대적인 증오의 대상으로,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너무 큰 등받이 의자」)에서와 같이 동정과 연민의 감정으로 시집 전편에서, 모순된 여러 가지의 감정을 수반한 이미지로 변주된다.

그 불구의 모습은 유년기를 통과하면서 더욱 견고하게 시인의 가슴에 자리잡게 되는데 청년기의 서울 생활은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조치원」)으로 기억되고, 사랑을 경험한 시인은 '못생긴 입술'(「그집 앞」)을 가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는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 대개의 부정(否定)이라는 것은 그 부정을 부정으로 만들게 한 어떠한 '정'의 세계 - 가령 이성복의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와 황지우의 '율도국'과 같은 - 를 갖게 마련인데, 기형도의 시에서 그 정의 세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이 불가능하고 시인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 「여행자」부분

라는, 변화에의 열망에서 패퇴한 좌절과,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부분

라는 아픈 독백을 거쳐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부분

라는 부정적 자기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시인의 인식, 그 소름끼치도록 견고한 묵시록의 종지부가 바로 '죽음'이라는 극단적 형태가 아닐까?

기형도의 시에서, 기형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변증이 불가능한 고통의 땅에 자신의 발을 묶은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오래된 서적」)라고 말한다. '독서행위'는 기형도가 절망의 세계에서 하나의 탈출구로서 자주 문을 두드렸던 곳으로 보이는데 그곳조차 '죽은 자들에 대해 추억이 바쳐지는 곳'(「흔해빠진 독서」)이다. 그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흔해빠진 독서」)의 궤적을 읽는 행위는 곧바로 시인 자신과 동일화되는데, 다시 한번 시인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영혼'(「오래된 서적」)을 발견한다. 이러한 일련의 '독서시편'들은 타자와의 소통 불가능성을 더욱 공고하게 시인이게 각인시킨다. 시인의 고립은 심화된다. 이러한 고립에서 기형도 자신의 유일한 대안은 '쓴다'는 행위 그 자체이다. 즉, 절망을 절망으로 있게 만든, 부조리한 세계의 관찰과 그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고립된 개별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시인은 '쓴다'. 시작메모에서 시인은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완충지대가 바로 이 '쓴다'는 행위인 듯 하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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