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점 반 우리시 그림책 3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 / 창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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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부지런히 심부름을 나섭니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시냐구요.”

작지만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인 구복상회 영감님은 고물 라디오를 수리하다 말고 무심한 눈길로 시계를 쳐다보고는 일러 줍니다.

“넉 점 반이다 ”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구복상회 마당을 나오다 물 먹는 닭을 한참 서서 구경합니다.

“넉점 반 넉 점 반. ”  몇 발짝 떼던 아가는 이번에는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 합니다.

소박한 꽃들이 예쁘게 핀 골목길에 쪼그려 앉은 아가는 무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개미를 구경합니다.  아가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아가에겐 개미가 그런가 봅니다.

“넉 점 반 넉 점 반.” 흘깃 아가의 눈이 잠자리에 멈춥니다.

“넉 점 반 넉 점 반.” 이번엔 잠자리를 따라 한참을 돌아다니는 아가. 또박 또박 당당한 걸음으로 걷다가, 꽃 위에 앉은 잠자리를 잡아보려 합니다. 보는 나까지 숨을 멈추고 기다립니다.

“넉 점 반 넉 점 반.” 이번엔 분꽃 따서 물고 노는 아기. 니나니 나니나....

나팔꽃과 수수가 익어가는 분꽃밭 너머엔 데이트를 즐기는 한 쌍의 처녀 총각이 수줍음으로 두 볼을 붉히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까까머리 학생들은 모처럼 좋은 구경거리에 신이 나고, 아기는 아랑곳 않고, 분꽃만 따고 놉니다.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기를 검둥이가 반깁니다. 이어지는 반전, 이제보니 아기네 집이 구복상회 바로 옆이네요. 부채너머로 아기를 보는 영감님의 표정이 익살스럽습니다. 뭔가 심증이 가는 눈치입니다.

당당히 심부름을 완수한 아가는 “ 엄마 시방 넉 점 반 이래.”

마루에 걸터 앉아 막내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엄마는 물끄러미 아기를 봅니다.  엄마의 표정속엔 당당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기가 살짝 어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지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봅니다.  방안에는 언니와 오빠들이 시끌벅적 모여앉아 맛있는 저녁을 들고 있습니다. 좁은 방안의 옅은 불빛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편안하게 반복되면서도 긴장감과 운율감을 더해가는 시와 예쁜 그림이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그림책. 책장을 덮고 나면 긴 책을 읽은 듯, 오래된 영화를 본 듯 여운이 남습니다.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들게 됩니다.  바쁜 엄마가 심부름을 시킬 때면 왜 그리도 어김없이 딴 길로 새곤 했던지. 야단을 맞아도, 제법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았던 나를,  큰 맘먹고 혼내시다가도 끝내는 웃고 마셨던 엄마. 엄마가 유난히 떠오르는 날입니다. 이제는 엄마 곁을 떠나 사느라 엄마 심부름을 할 일도 없어진 지 오래인데...

넉점 반 속에는 익살과 즐거움, 따뜻함과 그리움등 친숙한 우리 정서가 녹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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