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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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사교과서 채택과 관련된 뉴스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보통 정규교육을 받은 이후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역사를 찾아보거나 배우지 않는다면, 일반 대중이 가지게 되는 역사 인식과 지식은 중고등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국사교과서가 밑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인식은 그대로 그 사회에 반영되며 그 기간이 비판없이 지속된다면 그것이 다시 역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비극적이고 끔찍한 집단학살이 일어난 '제주4.3사건'에 대해서 얼마 전에 읽게 되었습니다.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해야할 사건이라고, 그런데 그 이름만 들어보았지 실제 어떤 일이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한겨레출판의 <대한민국 잔혹사>에 요약된 글귀를 먼저 소개합니다.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행사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4.3 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는데, 미군정은 이를 조사하면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열두 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이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사건 발생 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 한겨레출판, <대한민국잔혹사>

 

1910년에 국권을 빼앗긴 후 35년 만에 맞은 해방은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자체적인 힘이 아닌 타의에 의한 해방이기에 우리 스스로 하나된 나라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1948년 4.3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도 우리의 이 역사적 모순이 하나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p 64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통일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분단국가로 갈 것인가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만이 단독선거인 5.10 선거 강행을 결정했고, 정국은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도 단독선거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당시 이 격동하는 냉전의 흐름 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온 이승만을 선택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독 선거를 치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남쪽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북쪽 역시 9월 9일에 정부가 수립됩니다.

남한은 미군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고, 미군정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일제시대의 경찰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역사의 뼈 아픈 장면입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몸 담았던 이들을 신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숙청하고 무엇보다도 과거청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할 일제시대의 경찰이 오히려 다시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하고, 수십년 간 그 권력은 공고히 다져져 맥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총칼은 좌우대립, 색깔논쟁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민중을 향하게 됩니다.

<제주4.3을 묻는 너에게>를 읽으면서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고, 분노가 일어나고, 속이 메스껍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내놓은 <제주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작성한 이 책에서 당시 사람들의 증언은 글로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끔찍하고 힘든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당시의 무차별한 학살과 끔찍한 고문에 대해서 책의 내용을 잠시 전합니다.

 

그 전에 그들이 이렇게 학살되고 끔찍한 고문이 자행된 이유는 그들을 좌익사상에 물든 빨갱이라고 단정지은 당시의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고한 민중들 당시 제주도민의 1/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한 많은 죽음이었습니다.

 

p118

네 남편이 산에 갔다. 동생이 갔다. 형이 갔다. 심지어는 사위가 산으로 갔다 해서 희생당했다. 도피자 가족 수용소가 있던 세화리에서는 젖먹이도 빨갱이라며 젖을 주지 못하도록 한 경우도 생겼으며, 도피자 형이 있다고 해서 한 초등학생을 수업 도중 데려다가 총을 쏘았다. 순간 담임선생은 모두 일어서게 해 묵념을 했다고 살아남은 자는 증언했다.

 

p166

그러한 토벌대의 잔혹한 학살 현장에 있었던 당시 서른 살의 엄마 양복천, 초등학교 2학년 열 살 아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속엣것 다 토해내며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총상 입어 우는 딸에게 울면 발각된다고 울지도 못하게 했다던 그녀. 양복천 할머니의 이야기다.

 

p175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도 총살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가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습니다.

 

p192

"올레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서 엄마는 죽여버리고, 두 살 난 아기는 감나무 기둥에 묶어가지고 막 이렇게 죽여버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했다.

 

이런 증언들은 바로 조사 당시에 증언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밝혀야 한다고 기억해야 한다고 뱉어낸 쓰라린 기억들이었습니다.

위의 증언들을 보면서 당시 상황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부녀자, 어린 아이들, 임산부들에게 행했던 끔찍한 일들은 차마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워서 이 글에는 제외시켰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어떻게 이런 사건을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주4.3은 2003년 위원회의 조사에 따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으며,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어 2008년 3월 28일에 개관하였습니다. 또한 2014년부터 4월 3일을 '4.3 희생자 추념일'로 하여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올해가 제주4.3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첫해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픈 기억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조사들을 끊임없이 진행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아픈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의 중요성을.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반성하고 또 기억해야 함을 기억합니다.

 

p239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가습병을 앓다 간 할머니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지. "오직 양심 하나 믿고 살았수다. 우리야 시대를 잘못 만나 이렇게 살았수다. 우리 자식들 세대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 안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그해 그날의 비극을, 상처를, 죄없는 모든 죄를 다 쓸어안고 가겠다는양, 살다가 갔다.




p37

미군정은 점령 정책의 연장선 위에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경찰을 미군정의 경찰로 만들고 있었어. 그들에게 옷만 갈아입힌 후 미군정의 경찰로 다시 등용한 것이지. 청산하지 못한 옛날의 친일파들이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렇게 친일파들이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으니 상상이 가겠지.

 

p39

주민들에게네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름, 공출, 일본은 패망 직전까지 얼마나 공출 또 공출을 강요했던가. 비행장의 잔디 공출은 물론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가지 있었던 그 시절, 할당량을 못 채운 중년의 아버지들을 '구젱기당살(소라 껍데기)'위에 무릎을굻게 하거나 '석돌꿀림'이라고 해서 현무암 돌 위에 꿇게 하는 고문까지 이뤄졌던 공출이었다.

 

제주도 인민 30만은 지금 역경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모든 공장은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고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이 발호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방해하고 있다. "미군정이 존속하는한 경찰이 나를 체포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쌀과 자유를 달라! 이것이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이 아닐까   - <독립신보> 1946.12.19

 

p50

관덕정이 날아갈 듯한 총성과 함께 구경하던 6명의 주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제주 4.3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젖먹이를 안고 쓰러진 스물한 살의 젊은 어머니 박재옥, 그리고 바로 할머니의 작은아들, 그 소년도 있었다. 북국민학교 6학년 허두용은 그때 가장 어린 죽음이었다. 한 달 뒤면 중학생이 될 아이였다.

 

p51

이날의 총성은 겁을 주려 했던 단순한 공포탄이 아니었다. 발포는 위협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지. 부검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고 다른 5명은 모두 등에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날 총은 본토에서 온 응원 경찰에 의해서 발포되었고, 희생된 이들은 시위대가 아니라 단순한 관람 군중이었다. 물론 명백한 경찰의 과잉 반응이었다. 군중이 기마 경관을 쫓아 몰려가는 것을 본 경찰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알고 쏜 것이었다.

 

p51

경찰은 곧바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날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6시까지. 제주경찰서장은 경무부에 긴급 지원 요청. 경찰은 이 사건을 계속해서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규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강경 대응 쪽으로만 몰아가려 하고 있었다.

 

p55

대책위는 투쟁에 들어가면서 제주도 민정 장관 스타우트 소령과 주한미군사령부 하지 중장에게 다음의 요구 조건을 내놓았다. 그 조건이란 무엇일까?

 

우선 "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고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발포 책임자 및 발포 경관을 즉각 처벌할 것" 경찰 수뇌부는 책임지고 사임할 것" "희생자 유가족의 생활 보장 및 부상자에 대한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할 것" " 3.1 사건 관련 애국 인사를 검속하지 말 것" "일본 경찰의 잔재를 청산할 것" 등 여섯 가지였다. 그러나 이 건의문은 철저히 무산됐다.

 

p58

미군정은 사건의 원인을 찾고 문제해결을 하려는 것보다는 좌익을 몰아내는 일에만 더 힘을 쏟고 있었다. 무엇보다 3.1 사건을 좌익의 배후 조종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붙였다.

 

파업을 하는 것은 결국 조선인에게 영향이 돌아가며 미군정에는 하등 영향이 없고, 조선인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미군 정보 보고서 또한 제주도의 총파업에 대해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났다. 제주도는 인구의 70퍼센트가 좌익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ㅗ자익 거점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한마디로 제주도를 붉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땅, '붉은 섬'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p60

그들은 이 좁은 섬을 순식간에 폭력과 긴장의 섬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서청'이라면 울던 아이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일 정도였다. 젊은 여성을 희롱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p63

미군정은 3.1사건 조사에 이어 두 번째로 특별 감찰실의 감찰을 실시한다. 미군정 장관 딘 소장은 특별 감찰실이 원하는 대로 인력의 배치와 현지 조사 등을 명령했다.

미군정은 군정 장관에게 4개항의 건의를 포함한 특별 감찰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건의 내용은 이렇가. "유해진 지사를 경질할 것" "제주도 경찰에 대한 경무부의 조사를 실시할 것" "미 경찰 고문관은 제59군정중대의 임무를 함께 맡을 것" "과밀 유치장에 대해 조사할 것" 등이었다.

미군정의 조사 결과, 대부분의 제주도민을 좌익으로 규정한 유해진의 우익 강화 정책 같은 독선이 제주도민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p64

이즈음, 한반도는 긴장된 모습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개입한 가운데 통일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분단국가로 갈 것인가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남한만이 단독선거인 5.10 선거 강행을 결정했고, 정국은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 김규식 등 민족 지도자들도 단독선거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당시 이 격동하는 냉전의 흐름 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들고 나온 이승만을 선택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독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것이었다.

 

p64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강경파는 '6.10선거는 통일을 가로막는다'는 논리를 폈고, 이것은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된 것이다. 단독정부가 수립된다면 당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무저니기 때문에 조직을 수호하는 차원에서는 필사적으로 단독선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p65

1948년 1월 초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실시로 굳어져갔다. 남한 단독선거 계획이 명백해졌다.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이른바 '2.7 구국투쟁'이었다. 제주 지역에서는 2.7투쟁 방침에 따라 각 지역에서 시위 등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p69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위원단이 남한에 임국했으나,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북한에는 들어가지 못하자, 남한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익 세력은 1948년 2월 7일 '유엔임시위원단 반대,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미소 양군 철수'등을 요구하며 이른바 '2.7 투쟁'을 벌였으며, 이는 제주4.3사건, 5.10단독선거 반대 운동으로 확대되어나갔다.

 

p74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이 불을 켜고 있었다. 어미 같은 한라가 품고 잇었던 오름들, 볼록볼록 꾸물거리는 듯한 그 봉우리마다 일제히 벌건 불이 올라왔다. 타오르던 불들은 한참 후에야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은 밤새 그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산으로 간 무장대가 피워 올리는 불, 봉화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봉화 신호가 떨어지자 무장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도내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과 사무실이 표적이었다.

 

p77

이때 학생들도 좌익 세력의 민주애국청년동맹이나 우익 세력의 대동청년단 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좌익이 무엇이고 우익이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 어디든 붙어야 할 판이었다.

 

p80

아무튼 이 '오라리방화사건'에 대해 김익렬 연대장은 경찰의 후원아래 일어난 서청, 대청 등 우익 청년 단체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지. 그러나 김익렬의 보고는 철저히 묵살당한다. 경찰 측에서는 무장대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뒤이은 5월 3일, 귀순자들을 행해 괴한들이 총을 발포한 사건이 벌어진다. 나중에 이 괴한들은 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경찰에선 이 사건을 경찰을 가장한 무장대의 기습 사건이라고 주장했지. 끝내 이날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협상은 깨쪘다. 이후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로 치닫게 된다.

 

p81

5월 5일, 군정 장관 딘 소장은 비밀리에 김익렬, 조병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제주 회의를 연다. 그러나 이 최고 수뇌부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찰의 실책을 주장하는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육탄전을 벌였고, 평화적 해결 방안 찾기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김익렬 연대장은 전격 해임되었지.

 

p86

어쨌든 산으로 오른 저 사람들은 누구일까? 왜 주민들은 집을 떠나 한라산 자락으로 올랐던 것일까? 그건 무장대가 단독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선거일에 앞서 주민들을 미리 산으로 올려보낸 것이지

 

p88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4.3 무장봉기가 발발한 지역이 아닌가. 때문에 선거를 반대하는 좌익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미군정과 경찰의 공세 또한 치열했던 것이지.

 

p89

결국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소요와 유혈 사태가 빚어졌지만 이날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한 5.10 단독선거 거부 지역으로 역사의 장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해방된 땅에서 '조극이 쪼개지는 것은 안된다'는 제주도 민중의 망음이 강하게 표출된 것이었지.

 

p94

1948년 7월경, 제주의 경찰 병력은 약 2000명으로 불어났다. 더욱이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응원 경찰이 대거 파견돼 옴으로써 사태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즈음, 경찰이 주민들에게 가한 행위는 가혹했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고, 살려야 살 수 없다"고 절규하는 제주도민들의 목소리가 망망대해, 온 섬을 울리고 있었다. "먼 곳의 총은 무섭지 않지만 가까운 총부리가 무섭다"라고 외치는 섬 사람들, 그들을 감싸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p95

그랬다. 제주 섬은 유혈이 낭자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됐다. 9월 9일 북쪽에서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p96

미 제6사단장도 예하 부대를 통해 제주도 주둔 군정 증대와 미국인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제주경찰감찰청장 김봉호는 "이번의 응원 경찰대는 단순한 증원이 아니라 단기간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딘 군정 장관 등이 미리 게획한 것"이라고 했다. 미군 수뇌부의 개입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그것은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맺은 '한미군사안점잠정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p97

정부 수립이 진행되는 동안 일시 토벌을 중단했던 군인과 경찰을 앞세운 이른바 '토끼몰이식 수색 작전'. 이 작전은 죄없는 주민의 수많은 희생을 불러왔다.

 

p98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킬러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기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이라면 제주 지형상 해안 마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포고를 무시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것 아닌가

 

p99

미군이 조종하는 연락기는 중산간 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을 체포하거나 학살하는 데 이용됐다.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삼진 작전'이라는 끔찍한 대량 학살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p100

송요찬의 포고문이 발표된 다음 날, 제주도 해안은 즉각 봉쇄된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전, 토벌대는 섬의 유지들을 일제히 검속한다. 제주읍은 싸늘한 공포에 휩싸였ㄷ. 법원장이 연행되고, 신문사 편집국장, 제주중학교 교장 등이 총살된다

11월 초순께는 주로 제주 출신인 9연대 장병 100여 명이 군사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됐다.

 

한편, 이시기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초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제주 초토화 작전을 앞두고 제9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 명령을 받은 제14연대가 돌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 것이다. 이른바 10월 19일의 여순사건이다.

 

며칠 만에 여수, 순천을 진압한 정부는 이제 제주도에 대한 진압작전의 고삐를 더 죄어왔다. 여순사건에 직접 개입했던 미군도 제주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주시했다. 미군 고문관들은 진압 작전에 참여한 모든 부대를 돌면서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여순사건 진압과 더불어 제주도를 향해 정부는 무조건 진압을 명했다. 이후 섬은 휘몰아치는 피바람으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p104

소개, 이 말은 "공습 화재 등의 피해를 적게 하기 위해 한곳에 집중해 있는 주민 또는 건조물을 분산 철거시키는 행위"라는 사전적 의미였으나, 제주에서는 "토벌대가 중산간 마을을 무장대와 격리시킨다는 전제 아래 모든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로 해안 마을로 내려오게 한 것"을 말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소개시키고, 해변 마을에서는 주민 감시 체제를 실시함으로써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것이었다. 일부 중산간 마을의 경우 소개령이 채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토벌대가 마을을 덮쳐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총살하기 시작했다.

 

p111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희생을 가져온 때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6개월간,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안이 생겨나고, 눈앞에서 희생되는 부모를 지켜보는 아이들, 어린것의 죽음을 앞세운 부모들도 있었다.

 

p112

한편 이 무렵 무장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총공세를 벌였다. 무장대는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덮쳐 무차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해 갔다.

 

p112

자수하기 위해 군 주둔지인 함덕국민학교로 찾아갔던 조천면 관내 20대 청년 200여 명 가운데 150여 명이 "토벌에 함께 가자"는 토벌대의 말에 넘어가 트럭에 태워졌고, 그들은 곧 제주 시내 '박성내'라는 냇가로 끌려가 집단 총살되었던 것이다.

 

p113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제주 섬에 선포했다.

 

p115

진압군은 가족 가운데 청년이 한 명이라도 없으면 입산자로 몰아세워 '도피자 가족'이라며 총살했다. 대신 죽어야 했다. 이름하여 '대살', 이 말은 '살인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는 사전적 의미였지만, 당시 제주에서는 '남 대신 죽는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p118

네 남편이 산에 갔다. 동생이 갔다. 형이 갔다. 심지어는 사위가 산으로 갔다 해서 희생당했다. 도피자 가족 수용소가 있던 세화리에서는 젖먹이도 빨갱이라며 젖을 주지 못하도록 한 경우도 새겼으며, 도피자 형이 있다고 해서 한 초등학생을 수업 도중 데려다가 총을 쏘았다. 순간 담임선생은 모두 일어서게 해 묵념을 했다고 살아남은 자는 증언했다.

 

p120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무장대와 토벌대로부터 죽음을 피하려는 주민들은 산으로도, 산 아래로도 붙을 수 없었다. 이곳저곳 숨을 곳을 찾아 헤매다 토벌대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무장대에 의한 주민 학살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이른바 '군법회의'에 섰다.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1948년 12월의 군법회의에서는 민간인 971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기록으로만 봐도 12월 2일부터 6일, 12월 12일부터 20일까지 군인 사망 11명과 부상 8명을 제외하고 '적'으로 분류돼 사살된 도민은 677명, 체포된 사람은 162명, 노획된 총은 22정과 칼 55자루였다.

 

p122

그렇게 4.3의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그해 1월 10일과 12일 남원읍 의귀리와 수망리. 이날은 하루아침에 아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날이다. 졸지에 부모 잃은 아이들은 소년 가장이 되었으며, 어느 경찰의 수양딸이 되어 성을 바꿨다는 아이도 생겨났다.

80여 명의 주민이 희생당했다. 거기서 곧 아기를 낳았던 여인도, 이름조차 호적에 올리지 못한 아이도, 소년도, 아버지도 생을 다했다. 새벽에 무장대의 습격을 받자 무장대와 내통했다며 토벌대는 이들을 몰아세웠다. 무장대와 주둔군의 전투 한가운데서 주민들은 이 산 저 산 도망다녀야 했다. 애꿎은 마을 사람들은 당시 토벌대로 내려온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남원읍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됐다가 집단 학살당한다. 남원리 수망리 한남리, 하루아침에 농사짓던 사람들은 3개의 구덩이에 암매장된 것이다.

누가 누구의 유해인지 모를 이 시신들의 구덩이는 그로부터 54년이 지난 2003년에야 파헤쳐졌다. 어려서 부모 잃은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마을 사람들과 유골을 수습했고, 이들은 비로소 그들이 살던 땅, 수망리 위령공원에 안치됐다. 의로운 넋들이 한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이름. '현의합장묘'다.

 

p139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희생되었다. 이것은 1949년 미군 정보 보고서가 80퍼센트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장대에 의한 살상 행위는 얼마나 되는가. 4.3 무장봉기 초기,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원, 그리고 군경에 협조하는 우익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보복살해였다. 이런저런 형태로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

 

p148

특히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는 총 344명으로 이 가운데 252명이 군에 의해 희생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어난 예비검속 사건은 4.3 과 관련되는 이, 혹은 그와 관계있는 사람들 아니면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집단 학살한 국가 폭력의 한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에는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같은 날 새벽 2시에는 한림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그 학살터는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탄약고로 쓰던 곳이었다. 군경의 삼엄한 경비로 유족들은 지척에 있는 부모와 형제자매, 남편과 부인의 시신마저 수습할 수 없었다. 울음마저 소리낼 수 없었다. 1956년, 학살된 지 6년이 지나서야 모슬포 지역 유족들은 비로소 132주의 시신을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다. 허나 이미 살은 썩어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일. 유족들은 대정면 상모리에 시신들을 안장하고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 이라며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했다.

 

p151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제소자는 일반 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군법회의 수형인 2350여 명으로,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그들을 행방불명 희생자로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신고했다.


p156

그런데도 3.1절 시위에 나섰던 평범한 도민들을 '좌익'이라고 단정했던 미군정. 그들은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붉은 사상',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4.3 발발의 원인을 찾아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오로지 무조건 진압을, 그것도 무차별 집단 학살이라는 강경 진압 작전을 편 것이다.


p159

1948년 12월 9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집단살해(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에는, 제노사이드를 유엔의 정신과 목적에 위배되고 문명 세계에 의해 단죄되어야 하는 국제법상 범죄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p160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사상가 노암 촘스키도 "1945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기 때문에 제주 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 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 책임뿐 아니라 실체적이고 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물어야 할 때다.


p166

그러한 토벌대의 잔혹한 학살 현장에 있었던 당시 서른 살의 엄마 양복천, 초등학교 2학년 열 살 아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속엣것 다 토해내며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다. 총상 입어 우는 딸에게 울면 발각된다고 울지도 못하게 했다던 그녀. 양복천 할머니의 이야기다."


p167

1948년 11월 13일 새벽, 원동마을로 향하던 제9연대 군인들은 하가리를 지난다. 그 시각 중동네 정기봉의 집에서는 몇몇 사람이 모여 추렴한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토벌대는 우선 환히 불이 켜진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의 집을 덮쳤다. 또한 이웃집들에도 들이닥쳐 잠자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정기봉의 집 등 이웃 14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속칭 '육시우영'이라 불리는 인근 밭으로 끌고 가 27명을 집단 총살했다. 희생자 중 고순화는 만삭의 임산부였다. 이날 정순아 가족 중에서 5명이 희생당했다. 군인들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꿇어앉혀 놓고 총살 장면을 구경하게 했다. 군인들은 총을 난사한 후에 목숨이 붙어 있는 주민들은 대검으로 재차 학살했다. 이 자리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총살당하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p174

"모르쿠다"하면 무조건 총살. 살벌했다. 토벌대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살하는 장면을 직접 보도록 했으며, 어느 마을에선 저희끼리 불 지르라고 했다. 형이 없으면 아버지가 불을 지르게도 했다.


p175

토산리 창고 부근에서도 총살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총살할 때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총살 때 아기가 폴폴 기어서 위로 올라가니까 아기에게도 총을 쏘았습니다.


p176

"그때까지도 굴속엔 연기로 차 있었고, 너무나 괴로워서 어떤 사람은 손톱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벽이나 땅을 파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p181

피가 괄락괄락 쏟아지는데 세 살배기 아이가 젖인 줄 알고 빨아 먹고 있었어. 지그러운 시절이야. 또, 신혼 이틀 만에 죽은 사람이 제일 안 되었어. 어디 갔다 오다가 번쩍하게 군인들이 나타나서 돌아서니까 그냥 죽여버렸어. 처는 그 당시 안 죽었지만 곧 죽었지. 개 죽은 것처럼 묻지도 못했어.


p190

마을마다 아이들이 시든 꽃처럼 죽어갔다. 희망이란 이름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이었나. 아득하였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4.3 희생자 10명 가운데 1명은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가문의 멸족을 가져오기도 했다.


p192

"올레 마당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서 엄마는 죽여버리고, 두 살 난 아기는 감나무 기둥에 묶어가지고 막 이렇게 죽여버리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했다.



p193

거의 아기 엄마들이야. 부녀자들, 애기를 안아 있는 사람,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한 분 있어요. 촐왓에 전부 나오라고 해서 앉았어요. 그래놓고 신분 파악을 하였어요. 우리는 빙 둘러서 그것을 봤거든요. 한 젊은 엄마가 갈중이 적삼 입고 얼굴은 시꺼멓고 애기를 안고 있었어. 애기 안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어. 거기서 전부 쏘아버렸는데. 아직 젖먹인데 물애기, 그아기를 양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가지고 생돌에 몇 차례 메쳤을 거야. 순경이 그렇게 했어요. 다섯 살 아이 하나는 총살할 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했지요 그래도 쏘았어요.


p200

애월읍 비학동산에서는 도피자 가족이라고 해서 만삭의 여인을 팽나무에 매달아놓고 학살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강제로 구경하도록 했다.


p201

속으로 피가 흘러도 무서워 말할 수 없었다. 도피자 가족에 대한 학살은 더욱 잔혹했다. 고태명은 김녕지서 경찰들이 임신 9개월인 여인에게 "남편 숨은 곳을 말하라"며 끌고 가 고문하다가 끝내 배를 쏘아버렸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다. 해산한 지 사흘된 여인을 직접 죽인 서청을 직접 봤던 권영자의 증언이다.


한복 입은 젊은 여자였어요. 남편 어디 갔나고 다그치다가 죽여버렸어요. 한 가족은 남편이 산에 갔다면서 어린애 업은 엄마, 그 앞에 아들놈 둘을 세워두고. 엄마부터 죽였으면 좋았지. 아이들부터 죽이니까 엄마는 애기업고 손비비면서 '하늘님아! 하늘님아! 했는데 나중에 죽였어요.


p202

임신한 며느릴 걸상에 가로눕혀 배 위 양편에 나무판자를 대어놓고 널뛰듯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서 네 서방 어디갔느냐고 고문했지. '이 아인 모릅니다, 놔줍서'해도 놈들은 내 뺨을 때리고 그 짓을 했지. 어느 하르방은 말 되엉 엎드리게하고 어느 할망은 그 위에 타서 두드리게도 했어. 그게 어디 할 짓이랴.


p210

죄명도 모른 채 옥살이를 끝내고 요행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그들에게는 보안 감찰, 요시찰 대상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다. 그것은 공공연히 수상한 자를 찾아내듯 이뤄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취조하듯이 물어가는 경찰의 '뒷조사'때문에 마을 노인회 일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신원 조회! 한때, 신원 조회에 걸렸다는 말이 나돌았었다. 감옥살이의 이력은 '붉은 딱지'로 대물림되고 있었다. 거기에 걸려서 공무원이 못 되었고, 거기서 걸려서 육사나 군 장교로 갈 기회를 잃어야 했었고 거기에 걸려서 경찰공무원이 되지 못했고,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해 해외여행을 갈 수 없었다.


'신원 조회'라는 과정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를 걸러내는 사회적 관행으로 공공연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가족의 병력을 묻는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이어서 당사자들의 괴로움은 더 컸다.


p229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를 들고 나온 군사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반공의 이름 아래 족쇄를 채웠고, 4.3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사건으로 왜곡,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가르치도록 했다.

제주 말로 "속솜허라이(조용하라)". 우리 교육의 현대사 대목에서 4.3, 그것은 한 줄짜리 '폭동'이었다. 왜곡된 교과서로 공부하고, 왜곡된 교과서로 교단에 서야 했던 교사들 역시 시대의 피해자가 아닐까. 그동안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보다 교육을 할 수 없었던 교사들의 갑갑증이 더 컸으리, 무대는 있으나, 자유로운 공연을 할 수 없는 예술가와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허나, 진실과 인권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들불처럼 타올랐지. 그것은 1987년 6월민주항쟁이었다. 이는 정치권에서 4.3을 주목하게 하는 분수령이 되었고, 4.3의 진실을 향한 온 도민의 비원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4.3' 문제 해결은 너나없이 선거의 단골 공약이 되었으며, 소설과 시, 마당극, 노래, 그림도 그 아픈 영혼들에 꽃을 던졌다.

1988년 광주5.18청문회를 자신의 아픔처럼 지켜보던 4.3체험자들과 유족들은 마침내 용기를 내었다.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던 그 기억을 꺼냈고, 명예 회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상처 난 몸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1989년 민간단체인 4.3연구소가 발족돼 4.3 진상 규명 운동에 한 획을 긋는 많은 연구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지. 정부의 '4.3특별법'은 이름없는 묘비명처럼 묻혀 있던 무고한 죽음에 대한 하나의 위무였다. 1989년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제1회 4.3추모제'가 열렸다. 억울한 원들을 위로하는 에술 작품이 형상화되어 나왔다. 언론의 끈질긴 진상규명 또한 있었다.


p231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우원회(위원장 국무총리)'는 <제주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4.3 특별법의 취지대로 과거 인권 유린의 실태를 낱낱이 드러낸 이 진상 보고서는 위원회가 4년여에 걸쳐 일궈낸 방대한 진실 규명의 결실이었으며, 역사 바로 세우기의 기념비적인 일이었ㄷ. 이 이야기 역시 이 보고서를근거로 했음을 밝힌다.


p233

2014년은 4.3이 발발한 지 66년. 마침내 국가가 응답했다. 그동안 제주도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4.3의 해결에 대해 국가가 4.3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는 입법 예고가 이뤄졌다.

공식 명칭은 '4.3 희생자 추념일'이다. 4.3은 제주 4.3특별법의 기본 목적인 화해와 상생의 대통합을 위한 가시적인 걸음이 시작되는 것이지. 이 추념일의 제정은 무엇보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이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산 자들이 진정한 애도는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국가 공권력에 의해 큰 희생이 벌어졌던 이 역사를 너무나 모른다. 4.3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구현한느 것. 바로 교육을 통한 실천인 것이다. 그래야 적어도 그날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는 길이 되리라 믿는다. 그것 또한 진정한 명예 회복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4.3의 상처 위에서 좀 더 격을 세우고, 좀 더 내면화된 정신을 기려야 하는 것 말이다.


p235

4.3은 다시 말하거니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역사다. 중국 작가 위화의 말처럼 "'4.3사건'은 당신들이 생활하는 동안 시시각각, 마치 날마다 이 세상의 일출과 일몰과도 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인 것이다. 과거사가 아닌 아직도 밝혀야 할 부분이 많은 현재의 역사, 산자인 우리가 풀어야 할 슬픈 숙제인 것이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미국의 책임도 밝혀야 한다.


p236

과거를 모르고 어떻게 나를 찾겠는가. 과거사의 어둠을 그대로 방치한 채 어떻게 이 사회가 맑아지기를 바라겠는가. 오늘도 4.3은 너무나 오래 침묵했던 사람들인 우리에게 기억을 일깨운다. 산 자인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진실을 파내야 한다. 아직도 땅 밑에 묻힌 주검을 파내야 한다. 바닥에 수장된 주검을 건져 올려야 한ㄷ. 그 작업부터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말한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는 4.3의 진실을 말하지 않고 가서는 안 된다. 4.3이 왜 일어나고 뭘 원했던가. 제주도민이, 어떻게 죽어갔던가. 그것을 모르고서는 역사의 한 줄도 나가지 못한다. 그러지 않고는 제주도의 진짜 풍경으 보았다 할 수 없음을.



p237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기억의 타살을 다시는 겪지 않기를



p239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가슴병을 앓다 간 할머니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지. "오직 양심 하나 믿고 살았수다. 우리야 시대를 잘못 만나 이렇게 살았수다. 우리 자식들 세대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이 그해 그날의 비극을, 상처를, 죄 없는 모든 죄를 다 쓸어안고 가겠다는양, 살다가 갔다.


p240

이제 알겠느냐. 슬픈 역사, 그날 이후 제주의 서정은 그냥 그대로의 서정이 아니었음을. 섬 사람들은 왜 해가 뜨고 지듯이 잊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지를. 수많은 주검들이 떠다니는 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휘몰아치던 폭설의 한라산, 우왕좌왕 살기위한 발자국 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이 섬 어느 곳인들 안전한 곳 있었겠느냐는 말을...

그날 이후, 폐허가 된 가슴으로 그런데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정신적 외상의 트라우마와 육체적 고통을 안고 황혼을 보내는 이들에게 후손들인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앞엔  이 과제가 맡겨졌다.

 

통일로 가는 도정에서, 이제 우리는 기어이 불행했던 과거의 힘으로 평화와 인권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슬픔의 노래를 밝고 찬란한 4월의 노래로 덮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길 위에 젊은 네가 있다. 그래, 이제 이 제주 섬의 봄날이 그냥 그대로의 봄날이 아님을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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