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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ㆍ엄청난 대작이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해박한 배경지식, 방대한 스케일과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깊은 성찰과 반성이 우러나오는 주제의식까지. 촘촘하게 깔린 복선과 유기적인 구성의 힘이 무시무시한 흡입력을 발휘하며 작품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든다.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한 구성과 튼튼한 짜임새를 보여주는 소설. 참혹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 배경인 데다가 인류의 본성과 미래에 대해 근원적인 비판을 가한다. 그래서 작품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진지하다. 인간의 잔인함을 정면으로 비판하기에 다소 냉소적인 어투를 견지하나,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휴머니즘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책에서 일관된 목표는 생명의 구원이다.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필사적인 이야기다.
ㆍ미국인 용병 조너선 예거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프리카 콩고의 광대한 밀림을 가로지르며 무장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일본인 대학원생 고가 겐토는 불치병에 걸린 아이들을 구하고자 자신이 잡힐 위험을 감수하며 신약을 개발한다. 소설은 주로 두 사람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작품의 무대는 일본과 콩고 두 나라가 대상이다. (소설에서 악의 축 역할을 담당한 미국의 백악관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콩고의 자연환경, 열대우림에 대한 묘사는 묘한 이질감과 생소함을 불러일으키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콩고란 나라조차 낯설 것이다. 콩고 민주 공화국. 아프리카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 이 나라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슬픈, 비극의 역사다.
ㆍ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특히 콩고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에 제1차 아프리카 대전이 벌어졌었고(제 3차 세계대전이라 할 만큼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쟁이었다), 제노사이드(대량의 인종 학살)가 있었다는 사실. 대학살이 벌어졌지만, 선진국의 외면과 무관심 탓에 국제적으로 공론화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작중에서 수만 명의 사람이 죽은 것보다 고릴라 일곱 마리 죽은 사건이 더 크게 보도된다는 일침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ㆍ 『제노사이드』는 콩고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거론한다. 제노사이드, 피그미족, 반란군, 소년병 등……. 책을 읽은 후 관심이 생겨서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 및 자료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정말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에 무수한 나라들이 있건만, 관련 정보나 자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을 알았다. 지극히 단편적이거나 제한된 정보나 자료밖에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관심이 없음을 증명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ㆍ내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일본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의 선진국이 아프리카의 후진국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경제적이나, 정치적이나 크게 연관성이 없음은 물론 국제적인 중요도도 떨어지는 나라니까. 대중적인 인지도도 비슷하다. 콩고는 대중의 시선을 끌만한 이슈가 전혀 없다. 관광자원이 전무하고 치안이 몹시 불안정해서 방문할 만한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콩고를 주목하고, 아프리카의 현 상황에 관심을 둔 작가의 소신과 용기에 솔직하게 탄복했다. 아울러 초강대국을 비판하는 작가의 용기에도 감탄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위험 수위가 높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 전쟁 범죄와 정권 유착, 국제적인 고문과 정보 통제, 광범위한 감시와 인권 침해 등등 한 나라를 너무 노골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이 소설에 너무나도 위험한 키워드들이 가득해서 애셜론 시스템에 적발된 나머지, 미국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건 아닐까. 그래서 작가님은 한동안 절필에 빠졌고 그래서 10년도 넘은 지금에야 신간을 출간할 수 있었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공상에 빠져봤다.
"스포 주의하세요"
ㆍ콩고에서 조너선 예거 일행이 탈출하느냐, 그리고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의 치료약이 개발되느냐 여부는 소설의 중심 스토리이자 다. 두 문제 다 시한이 정해져 있고 시한이 지나면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이야기는 대단히 긴박하게 돌아간다.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대적자가 무려 초강대국의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끝까지 놓칠 수 없다. ‘누스(NOUS)’를 말살하고자 하는 미국 대통령의 의지는 강력한 것이었다. 미국이 적이 되었을 때의 상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누스는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지성을 가진 존재. 초강대국 미국이 행사하는 최첨단 과학 기술의 힘을 누스는 초인적인 지성의 힘으로 물리친다. 그렇기에 콩고 중앙부 밀림의 한복판에서 일본까지 오는 이 여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악한 교통 인프라에, 스무 개가 넘는 무장 집단에, 미국의 집요한 방해와 파괴 공작 등 갖가지 악조건들을 돌파하고 일본에 당도하는 여정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장대했다. (그래서 영화화가 안 됐나?)
ㆍ 『제노사이드』의 발단이 된 존재 ‘누스’.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류다. 현생인류를 압도하는 지성을 가진 존재의 지적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제 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점, 제 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p247)’.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누스는 그 지성을 활용해서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는데, 그 활약에 요구되는 배경지식조차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스를 설정한 작가는 인간종이 맞을 텐데……. 내 머리의 한계이겠지. 아무튼 누스가 만약 실존한다면, 우리 인간은 누스에 자비를 구하며 그의 인도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도 인간이 어리석은 행위를 반복하며 전쟁을 일삼는 것을 보면, 다음 세대로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나보다.
ㆍ책을 읽으며, 나도 주인공 일행의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콩고에서 무사히 탈출했을 때 적잖이 안도했다. 그만큼 몰입감이 컸다는 얘기다. 숨 가쁘게 달려오는 여정이 마침내 끝날 때, 진한 감동과 여운이 몰려왔다. 그리고 굳건한 마음이 들었다. 제노사이드는 더이상 없어져야 한다. 제 3세계의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이 지구상에는 여전히 폭력과 살육이 횡행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을 공유한다면, 평화는 최대한 확장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이 책이 말하는 의미가 무익하지는 않겠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최악의 경우가 되기까지 놔둘 정도로, 인간이 타락하지는 않았으니까. 우리 인간의 지성과 도덕성을 믿는다.

+ 예거 일행이 콩고 밀림에 진입했을 때, 침팬지와 원숭이들의 싸움을 목도한다. 원시적인 비경(秘經)의 주인들- 그리고 난폭하고도 잔혹한 광기의 살육 현장. 아기 원숭이의 고통이 어서 끝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 자연 환경의 순리와 법칙에 위배되는 인간의 개입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 <하이즈먼 리포트>는 인류 멸망의 여러 가지 요인을 언급하고 있다. 우주적인 규모의 화재, 지구적인 규모의 환경 변동, 핵전쟁, 역병, 인류의 진화 등이다(여기서 인류의 진화가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작가님. 다른 요인도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요건을 충분히 갖췄는데 소설화해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제노사이드』 같은 대작을 기다립니다……!
+ 이 책의 중심 소재가 신약 개발이고 등장인물들이 이공계 종사자라서, 이과 계열의 전공 지식들이 대거 등장한다. 문과인 나로선 그들의 대화가 대단히 낯설었다. 거울 나라의 우유, 반데르발스 힘, 공유 결합 등의 표현을 보면 이과 애들은 이러고 노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세계다……. 이후 본격적으로 신약 개발에 따른 전문적인 용어와 설명이 나올 때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너무나도 어렵다! 대여섯 번째 읽는데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나에겐 평생 상종할 수 없는 영역일 듯. 이 어려운 소재를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가 그저 대단할 뿐이었다. 작가님 영화 감독 지망생이었다면 문과 출신 아닌가요? 소설가로서의 능력도 대단한데 이과 계열의 지식까지 갖췄다니 작가님이야말로 천재 아닐까요? 당신은 문학계의 누스입니다.
+ 『제노사이드』에서는 한국인이 등장한다. 그것도 중요 등장인물로. 작가는 한국인을 등장시키면서 한국인만이 공유하는 ‘정’에 대해서 설명하는가 하면, 한일 양국간의 민감한 사안을 부각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관동 대지진과 난징 대학살을 일본인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라 정의하는데,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작가는 용병들 중에서 굳이 일본인 용병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시키고, 그에게 가차 없이 비참한 운명을 선사한다. 전작에서부터 사회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작가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국에 대해서도 이 정도까지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과 감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국인의 입장으로선, 자국이 저지른 잘못을 과감히 인정하고 적시하는 작가의 소신에, 감사하고 경탄할 따름이다. 작가의 말처럼 시대는 변하고 있다. 선조가 어리석으면 후손이 고생하기 마련(p171)이라는 작가. 작가 같은 일본인이 있어서,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 피그미 족의 타고난 선량함과 평화주의를 보면서, 그들이 받는 가혹한 대접에 분노감이 들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의 밀림에서 몇 만 년을 살아오며 숲과의 공존을 터득한 지혜로운 이들. 그런데 이들은 정부에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국적이 없다. 심지어 현지의 인간들은 피그미 족을 식량 취급한다. 사냥해서 요리한다는 대목은 끔찍했다. 더불어 콩고의 실태- 무장 집단의 잔인무도한 유린과 학살, 그리고 소년병의 현실에 대해서 경악했다. 정말이지 인간의 잔인함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란 생각이 들었다. 누스가 우리 인간종을 멸시해도 할 말이 없다. 이런 미개하고 비도덕적인 종족이 있겠나 싶겠지.
+ 아버지의 부정(父情)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고가 세이지의 부정, 조너선 예거의 부정, 그리고 누스 아키리의 아버지인 피그미족 에시모의 부정. 특히 아키리와 에시모의 이별은 애틋했다. 원치 않은 생이별을 해야 하는 두 사람……. 아키리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유일한 장면이었다. 초월적인 지성을 가졌으니까,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혈육의 정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누스의 냉담한 태도를 그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무기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