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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상징사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 2021년 5월
평점 :
중세에서 ‘상징’은 매우 일상적인 사고와 감수성의 양식이었다(p11). 상징은 일반적이며 대중적인 것이었으므로, 중세의 작가들은 상징의 의미나 교훈을 따로 알릴 필요가 없었다. 중세 문화에서 상징은 사고의 기본적인 도구였다. 곧 상징은 복수의 매개물로 표현되고, 다양한 의미의 층위에 자리하며,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p12).
중세인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현대인들은 상징의 모호성과 다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징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저자는 중세에서 가장 상징적 주제로 많이 쓰였던 것들을 선정한 다음, 동물·식물, 색·표장, 놀이·영향의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 상징적 주제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동물·식물 : 동물, 사자, 멧돼지, 나무, 꽃
2. 색·표장 : 색, 흑백, 염색, 붉은 털, 문장, 깃발
3. 놀이·영향 : 체스, 아서왕, 라퐁텐, 검은태양, 아이반호
제목만 봤을 때는 주로 문장과 표장을 분석하는 내용을 다룰 줄 알았다.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상징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상징체계에서 요소들은 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상호 관계에서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사자, 용, 레오파르두스는 관계에 따라 상징하는 의미가 달랐다. 사자의 양면성으로부터 레오파르두스란 상징이 파생했으며, 다변적인 의미작용과 변용을 거쳤다. 사자이자 표범이기도 한 레오파르두스는 오늘날 영국 왕실의 문장에서도 모습을 볼 수 있다.
상징사라고는 했지만 동물 재판, 염색업자 같이 중세의 생활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동물 재판은 말 그대로 동물을 재판했다는 말이다. 살인죄를 저지른 동물은 체포, 수사, 판결의 정식 절차를 거쳐 처벌을 받았다. 살인은 주로 갓난아기 살해가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과 달리 집에서 가축 사육을 했던 중세로서는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사고였을 것이다.
돼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판결을 읽어주고, 처형대에서 목을 매달아 죽인 중세 사람들. 이 행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중세에서는 동물도 영혼이 있으니,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적 절차를 적용하는 것이 동물에게 보다 나은 대우인 걸까? 동물은 인간보다 하등하다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중세인보다 현대인이 더한 걸까? 동물에 대한 인도적인 대우는 적어도 현대보다 중세가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르겠다(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죽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색에 대해서도 중세 신학계는 치열한 논쟁을 통해 의미를 부여했다. 빨간색, 녹색, 노란색은 사치스러운 색이라고 경계하는가 하면, 흰색·검은색은 존엄한 색으로써 왕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 되기도 했다. 색에 대해 가톨릭은 경계하고 배척했다지만, 사실 중세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났던 것은 가톨릭 성당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칼벵, 루터 등 개혁가들은 빨간색은 사치와 죄악의 최고치를 상징하는 색(p183)이라며 비난했다는데, 교황의 법의는 (지금까지도) 붉은색이다. 색에 대한 경계, 가톨릭에 대한 반동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는 심플하다. 색과 실내 장식을 최대한 제한한 조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교인으로서는 마땅한 조처일지는 모르나, 보는 입장에서는 다소 아쉽다. 시각적·물질적 효과에 약한 어린 양은 반짝이는 황금과 오색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에 눈을 뗄 수가 없네요.
문장에 관심이 있어서, 문장에 대한 파트를 가장 주의 깊게 읽었다. 문장의 출현은 11세기 말~12세기 중반 사이 이루어진 군사 장비의 발전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적군과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기호로 방패의 넓은 평면에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동물·꽃 등을 그려넣는 관습이 생겨났는데(p243), 그것이 문장의 출현이었다. 최초 군주나 영주, 왕들만 사용했던 문장은 귀족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문장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표장적 이미지였지만, 그 문장의 색과 형상은 권력을 뒷받침하는 상징적 의미도 나타내고 있었다(p14).
문장의 형태는 문양과 색으로 구성되었다. 방패꼴 형태 안에 문양과 색을 배치하는 것이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 문양과 색은 자유롭게 사용하거나 조합할 수 없었다(p255). 가장 중요한 규칙은 색 사용에 관한 규칙이었다. 색은 여섯 가지 색만 허용되었으며, 이 여섯 가지 색도 자유롭게 배합할 수 없었다. 여섯 개의 색을 두 개의 집합으로 분류하고, 같은 집합에 속한 두 색을 나란히 사용하거나 겹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또 책을 읽다가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같은 가문이라고 문장을 똑같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가의 장자만이 ‘완전한’ 문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외 다른 자식이나 가문 소속 구성원들은 문장에 변형을 한 ‘분가 표지’를 써야 했다. 단, 여성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깃발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문장의 사용이 깃발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고, 깃발은 오늘날 국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했다. 유럽 국가들의 국기는 문장의 색 사용 규칙을 적용해서 만든 것이다(유일하게 포르투갈이 예외적 사례라고 한다). 문장과 깃발과 국기. 이들은 만들어진 집단 나아가 국가의 정체성을 의미하기 위한 ‘상징’으로 연결된다. 서양 중세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상상이 언제나 현실의 일부를 이루듯이, 중세에 관한 우리의 상상도 아무리 정서적이고 허구적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고 살아가는 실재이다. (…) 마르크블로크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하자. “역사는 단지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p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