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드디어『칼』이다. 내 기준 2022년 상반기 최대 기대작!
내가 전작인『목마름』을 읽고 서평을 작성한 것이 2021년. 읽었을 당시 후속작,『칼』이 이미 발간된 것을 알고 있었다. 신작이 나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마름』에서 ‘홀레 후드’란 용어가 등장했었다. 해리 홀레 신화에 푹 빠진 학생들을 지칭하는 경찰대학의 속어를 의미했다. 그런데 ‘홀레 후드’는 소설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시리즈 완독은 물론 전권 서평 작성을 달성한 나도 엄연히 ‘홀레 후드’에 해당하지 않을까?

우선 한국의 ‘홀레 후드’로서 한국판 표지가 엄청 예쁘다는 말을 해둬야겠다. 우리가 옛날에 살색이라 불렀던, 아주 연한 주황색의 표지다. 해리 홀레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산뜻한 색깔의 표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실물을 봐야 한다! 유광 코팅을 한 칼날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데 반전이 있다. 칼끝을 따라가 보면, 파고든 주름과 배어나오는 피가 칼의 살벌한 용도를 암시한다. 이 칼이 파고든 것의 정체는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 표지를 매만졌을 때, 벨벳 마냥 부드럽게 느껴지는 이 촉각의 정체는? 업계에선 촉감 코팅이라 부르는 후가공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직접 실물을 보고 느껴야 한다.
표지 예찬은 이쯤으로 해두고, 내용 감상으로 들어가겠다.
이번엔 어떤 비극이 해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도 작가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라켈이다.
라켈.
해리가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여성. 평생의 연인. 그녀가 살해당한다. 그녀의 집에서. 칼로. 라켈과 결혼해서 해리가 모처럼 안정적인 삶을 사는가 싶더니, 행복은 지극히 짧았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작가가 작품 구상을 할 때, 해리를 어떻게 고통으로 몰고 갈 것인지가 구상의 대부분을 차지함이 틀림없다. 해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끝내 라켈을 데려가는지……. 그리고 작중에서 라켈은 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회상에서만 등장한다. 사실상 그녀가 직접 등장하는 장면은 『목마름』이 마지막이다(『목마름』에서도 출연 빈도는 낮았다).『레드 브레스트』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로, 해리의 곁을 지키며 때로 사건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던 라켈. 그동안 해리와 지내며 고생이 많았다……드디어 흉악한(?) 작가의 손에서 놓여난 그녀에게 평안이 깃들길.
해리는 라켈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다.
그가 용의선상에 올린 범인은 ‘약혼자’ 스베인 핀네. 피해자들을 강간해서 임신시킨 뒤, 아이를 출산하면 그 여자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살인마. 그는 전작『목마름』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해리와 핀네는 질긴 악연으로 묶여 있다. 그는 해리에게 붙잡힌 탓에 감옥에 20년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또한 그의 아들은 해리에게 살해당했다(『목마름』의 발렌틴 예르트센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핀네다). 이만하면 라켈을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지 않은가?

『칼』은 라켈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독자는 해리의 치열한 사색과 추리가 동반된 여정을 함께 해야 한다. 그 여정은 자잘한 복선과 치밀한 탐색으로 가득한 여정이며, 해리와 독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의심이 수반된 여정이기도 하다. 마침내 해리가 여정의 끝에 도달했을 때, 결말은 고통스러운, 쓰디쓴 진실을 알려준다.
사실 책을 읽을 때 범인을 추측하면서 읽었다. ‘홀레의 법칙’을 의심하기도, 수용하기도 하면서 읽었다. 친숙한 인물들 또한 의심의 대상에 포함시키며 읽었다. 작가가 제시한 단서를 주의 깊게 눈여겨보며 범인을 추정했다. 하지만 범인은 내 생각으로는 절대 아닐 거라 제외했던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발견했던 단서는 더 중요한 단서에 가려진 위장 단서에 지나지 않았다. 세밀하게 배치된 단서들을 다시 되짚어보며 작가의 기량에 감탄했다. 『목마름』에서 느꼈던 부족한 부분이 『칼』에서 완벽히 충족된 기분이었다.
범인의 동기 또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원한과 증오에 의한 살인.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동기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은 분명하나, 적어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범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범인의 행동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접근한 서술이 마음에 들었다.『폴리스』에서 베아테를 죽인 범인의 동기, 원인, 행동에 대해 아쉬웠던 부분이 컸기 때문에, 이 부분이 내겐 더 부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칼』은『폴리스』,『목마름』과 연관되는 부분이 많다. 또한『칼』은 해리 홀레 전 시리즈를 망라하는 유의미한 작품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나왔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총체적으로 등장하며 초기작의 사건이 언급되기도 한다. 후속작에서 해리의 활동 영역이 노르웨이 밖(편집자 말씀에 따르면 미국 뉴욕이라 한다)으로 옮겨질 것으로 예고되었다. 그렇다면『칼』은 오슬로 삼부작 시리즈에 이어서, 노르웨이에서의 해리의 활동을 결산, 집대성하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편, 『블러드 문』에서는 어떤 살인자가 해리를 기다릴까. 한 가지 점은 확실하다. 더 이상 어떤 살인자가 어떤 살인을 저지르든, 해리의 심장을 파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의 심장은 오직 한 사람만의 것이었고, 그 사람은 이미 해리의 곁을 떠났으니.
덧.
1. 미카엘 벨만은 잠깐 등장한다. 그는 경찰청장에서 승진,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의 몰락은 도대체 언제쯤인가. 네스뵈 작가님께서 벨만의 응징을 부디 잊지 않으셨길 바란다.
2. 라켈을 잃은 비극 속에서도 해리와 올레그, 부자간의 정은 굳건했다. 해리를 아빠라 부르는 올레그. 내가 생각하기론 아마 여기서 처음으로 드러난 호칭인 듯한데, 애틋했다.
3. 해리 홀레 시리즈 최초로 아시아 계열이 등장한다! 그것도 한국계 노르웨이인이다!! 성민 라르센. 해리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 크리포스의 젊은 수사관이다. 여유로운 분위기에 부유한 환경을 가진 것으로 짐작되는, 능력 있는 수사관으로 나온다. 베아테를 연상시키는 탁월한 기억력을 보유한데다가 수사 실력도 출중한 편이다(아직 해리를 따라오려면 멀었지만). 그는 자신감 가득하고 야심만만한 성향을 가진 입체적인 성격이다. 전작의 발데르스와 비교해 볼 때 작가가 꽤 매력적으로 설정한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성민의 활약이 매우 기대된다! 설마 단발성 캐릭터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4. 해리 홀레 시리즈에는 은근히 분쟁지역이 자주 등장한다. 『레오파드』의 콩고에 이어서 이번엔 아프가니스탄이 나온다. 그리고 카라카스가 슬쩍 언급되는데……안 돼요! 카라카스는! 아무리 해리여도 그렇지, 카라카스는 외국인이 무사히 생존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지 않나요!
5.『목마름』에서 카트리네와 비에른 부부를 걱정했다. 베아테와 할보르센이 생각나서……. 그저 슬프다.
6. 이번에도 나온 홀레의 연락처. 이전 서평에서 연락처의 변천사가 시리즈를 읽음으로써 발생하는 소소한 즐거움이라 썼던 적이 있다. 한데 7개밖에 안 되는 연락처가 또 줄게 생겼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연락처를 추적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스페셜. 『칼』 속의 '칼'에 대하여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칼을 무서워할까? 칼은 인류 최초의 도구고 인간은 250만 년에 걸쳐 칼에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어떤 인간들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운 도구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 집, 농사, 음식, 방어. 칼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새 생명을 창조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 이걸 이해하고 인류가 이뤄낸 결과와 그 기원을 수용한 자들만이 칼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사랑. 역시나 동전의 양면이다.
p26
‘칼’ 은 책의 제목이면서, 작중 살인 흉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칼이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한편, 다양한 종류의 칼을 등장시킨다. 『칼』을 읽은 기념으로, 『칼』을 품고 ‘칼’을 보러 인사동에 있는 칼 갤러리에 갔는데, 문을 닫았다. 에잉…….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작중에 등장한 칼들을 모아봤다.
『칼』 스페셜! 『칼』에 등장한 ‘칼’ 소개 특집이다!
람푸리

스베인 핀네의 애장 컬렉션 중의 하나.
인도 마피아가 애호하는 칼. 책에서 소개된 칼은 호랑이 발톱 모양의 ‘카람빗’이라고 하는데, 카람빗은 동남아 지역의 전통 나이프라고 한다. 람푸리를 검색하니까 이 이미지가 나왔다.
2. 카람빗

카람빗은 로아르(아프가니스탄을 다녀온 군인 출신)의 호신용 칼로 나오기도 한다.
이 이미지가 카람빗의 일반적인 형태. 짐승 발톱처럼 굽은 형태의 곡도다.
3. 푸코

스베인 핀네의 애장 컬렉션.
핀란드 산으로 짧게 휘고 끝이 뾰족한 칼날이 달린 것이 특징인 칼이다.
4. 자바산 칼

마찬가지로 스베인 핀네의 애장 컬렉션.
뱀처럼 휘어지고 칼자루가 달려 있다고 나온다.

작중에서 핀네가 뱀과 미녀가 홀리는 것 같은 기운이 서린 칼(p27)이라고 평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 이미지가 딱이다. 신묘한 기운이 절로 흘러나오지 않은가??
5. 토지로

라켈을 살해한 문제의 칼.
일본산이며, 작중에선 전통적인 산토쿠 양식으로 제작된 칼이라 소개된다. 보통 떡갈나무 재질의 칼자루가 달려 있지만 책에서의 칼은 물소뿔 칼자루가 달려 있다고 나온다.

물소뿔 칼자루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묘사된 내용을 볼 때, 라켈의 주방에 설치된 떡갈나무 재질의 토지로 세트는 이런 이미지였을 것 같다.
이상, 『칼』 중의 ‘칼’ 특집 끝!
다음에 한 번 꼭 인사동 나이프 갤러리를 방문해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해리 “난 아직 잠들어 있어. (…) 깨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야.”
p118
해리 “사랑은 모든 것의 뿌리야. (…)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p392
카야 솔네스 “난 아름답고 망가진 걸 좋아해요. 당신처럼. 나도 조금 망가졌고.” p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