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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평점 :

감상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2권, 『내가 죽인 소녀』의 개정판이 나왔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난 하라 료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다.
이 책이 시리즈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시리즈인 데다가 2권이라서 순서대로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막상 읽어보니 굳이 앞 권을 읽지 않아도 될 듯하다. 시리즈는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이 각 권마다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번 개정판의 특별한 점이 있다.
구판이 발간된 때는 2009년. 무려 13년 만의 개정판이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사는 본문을 전면 개정했다. 소개에 따르면, 10여 년의 세월을 반영해 현재의 감각으로 전문을 섬세하게 가다듬었다. 또한 전작과 일체감을 높이는 표지 디자인을 완성해 소장품으로서의 가치도 제고했다고 한다. 과연 서점에서 검색한 시리즈의 표지를 보니 통일성 있는 표지가 마음에 든다. 비채가 사와자키 시리즈를 차례 차례 개정해서 내놓는 중인 것 같은데, 기존 팬이라면 즐거운 소식이지 않을까.
또한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하드보일드 장르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드보일드 장르에 속하는 책으로 『몰타의 매』, 『소름』 등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하드보일드가 미국에서 탄생한 것이니만큼, 이 장르에는 미국 작가들의 책이 주류를 이루지만 일본 작가들 또한 하드보일드의 발달에 일부 기여했다. 그 중에서도 하라 료는 일본에서 정통 하드보일드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책 『내가 죽인 소녀』의 경우, 추리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제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고. 더불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랭킹 1위에 선정되고, 이듬해에는 팔콘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이라고 한다. 두 번째 소설로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인기를 받은 것이다. 음,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초기작 『박쥐』와 『바퀴벌레』는 어땠지. 작가와 해리 모두 풋풋한 모습이었지. 앗, 네스뵈 작가님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데뷔작에 이어 불과 1년 반만에 발표한 『내가 죽인 소녀』.
초기작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정통 하드보일드를 정석적으로 구현한 소설이다. 난 사실 하드보일드를 잘 읽지 않는데, 하드보일드가 추구하는 분위기와 정서가 나와 잘 맞지 않은 까닭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따분하고 지루했다. 서사보다는 문체와 분위기에 치중한 느낌? 그런데 『내가 죽인 소녀』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드보일드 특유의 건조한 문체와 진지하고 사실적인 분위기는 견지하면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반전이 있는 결말로 독자를 유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읽을 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기분이었다. 하드보일드란 장르를 즐기는 재미와, 주인공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데에서 오는 재미!
주인공 사와자키 탐정도 매력적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과거가 있는 중년의 탐정. 마냥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현실적인 설정의 인물이다. 잇속과 실리를 철저히 챙기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천재적인 지능을 가진 명탐정에 해당하는 것 같진 않지만, 사와자키는 매사 투박하고 진지한 자세로 사건에 임한다. 명쾌한 추리는 없어도, 언젠가 사건을 해결할 거라는 믿음이 가게 만든다.

제목이 ‘내가 죽인 소녀’다.
제목만 봤을 때 읽기 전부터 주인공이 살인자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탐정이 주인공이고 시리즈물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사와자키가 누명을 쓰고 오해에 벗어나기 위한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했다(‘김전일 시리즈’를 본 탓이다;;).
결말까지 보면, 내가 죽인 소녀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뭐라는 거야;;).
책을 다 읽고 난 뒤, 사건의 과정을 돌이켜볼 때 사와자키가 책임감과 의무감이 상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사와자키의 모습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탐정도 안타깝고, 유괴된 소녀도 안타깝고, 범인도 안타까웠던 『내가 죽인 소녀』.
정통 하드보일드의 낭만에 흠뻑 취한 채 결말에 다다르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하시리라고 생각한다.
덧.
1. 이번 개정판의 특별한 점이 또 있다!
특전으로 국내 미공개 단편인 「감시당하는 여인」이 수록되었다는 점! 읽고 나서 사와자키 탐정에게 묻고 싶었다. 아니, 왜 그 돈이 위험한 겁니까?! 도대체 왜??!!
2. 『내가 죽인 소녀』 사건 소재는 유괴다.
본문에서 사와자키와 경찰 이사카 경시가 대화를 나눌 때, 어린이 유괴 사건 대부분은 피해자의 근친자나 친척, 지인이나 친구 혹은 피고용인 등이 저지른다(p264)고 나온다. 즉 면식범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친분이 있는 아이를 대상으로 유괴를 한다고? 아동 유괴범들은 몽땅 사형시켰으면 좋겠다.
3. 비채 출판사 덕분에, 또 하나의 좋은 시리즈를 알아서 기쁘다. 홀레 시리즈도 차근차근 읽어서 독파한 것처럼, 사와자키 시리즈도 전부 읽을 생각이다. 2권부터 읽었지만 다음부터는 순서대로 읽어야지.

인상깊은 구절
마카베 오사무 “작가는 등장인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멋대로 움직이려는 인물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p54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시간은 약간 빨리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에겐 늘 시간이 부족하다. p187
사와자키 “모두 잘못이지만, 적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잘못을 선택하려는 노력은 해야겠죠.” p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