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상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작중 시간적 배경은 2020년대, 정확히 말하자면 2024년~2027년으로, 공간적 배경은 미국이다. 이 시기 자연은 기후 변화로 인해 정상적인 생태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비가 고작 육칠 년에 한 번씩 내린다. 이 얘기는 곧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물이 휘발유보다 몇 배나 더 비싼 세상이 되었고, 도처에 굶주리는 자가 넘쳐난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경찰은 오히려 뇌물을 요구하거나 재물을 강탈하는 집단이 되었다. 공권력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마약중독, 방화, 강도, 강간, 살인 등의 범죄가 일상적인 현실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켜야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로런 올라미나는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떨어진 소도시, 로블리도라는 곳에 살고 있다. 여기 또한 각종 범법적 행위가 횡행하고 있지만,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장벽이 지켜주고 있다. 로런의 가족은 장벽이 둘러싼 폐쇄형 주택단지의 구성원이다. 그녀의 부모님,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직장을 다녀서 수입이 있다. 그리고 로런의 아버지 올라미나 목사는 교회 목사로서, 동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올라미나 목사의 지도하에 동네 사람들은 순찰대를 결성하여 안전을 도모한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로런은 사격하는 법을 배웠다. 총을 구하는 것은 불법이나 모두가 총을 소지하고 총기 사용법에 숙달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해당할 확률이 높으니까.
강도, 강간, 살인이 넘치는 밖의 상황에 비하면 안전한 상황이기는 하다. 그런데 로런은 안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라도 밖의 사람들이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또 경계한다. 그녀는 비상 배낭을 만들어 놨다. 말 그대로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주로 생존용품들로 채워진 배낭이다. 로런은 자기처럼 이 배낭을 모두가 갖출 것을 주장하지만 동요를 염려한 아버지에 의해서 기각된다. 하지만 로런의 선견지명이 옳았다. 그녀의 비상배낭은 요긴하게 사용된다.
동네를 향한 습격이 점차 빈번해진다. 그리고 로런의 가족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동생 키스가 죽고, 아버지가 실종된다. 결국 마약 중독자들에 의해 동네가 불탄다.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혼란 속에서 로런은 간신히 탈출한다. 원래 로런은 열여덟 살이 되면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동네의 생존자, 해리와 자라와 함께 북쪽으로 길을 떠난다. 이제 그들을 지켜줄 장벽은 없다. 사방이 적이다. 그들은 과연 무사하게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창시한 디스토피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가 왔을 때 인간이 맞닥뜨릴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산다. 훔치고, 시체를 뒤지고, 죽인다. 아니면 마약에 중독돼서 불을 지르고 쾌락에 미쳐 살인한다. 여덟 살짜리가 강간당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식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약자라 해서 안심하면 안 된다. 아이나 노인이라고 안심했다가, 오히려 소지품을 강탈당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화폐경제는 그나마 유효해서 돈이 있으면 물이나 식량, 총과 탄약 등을 구입할 수 있다. 부자들은 경비원을 고용하고 보안 체계를 확실하게 해놓는다. 총과 무기로 무장한 안전 구역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체계는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불안한 시스템이다.
이 책의 현실은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더 긴장하고 공감하며 책을 봤다. 과연 나는 이런 상황이 올 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로런처럼 나도 비상 배낭을 하나쯤 구비해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런은 길을 가는 도중 점점 동료들을 늘려간다. 로런의 일행은 수를 불려가며 하나의 집단이 되다시피 한다. 로런의 동료들은 대부분 그녀보다 연상이다. 그런데도 이 집단의 리더는 로런이다. 열여덟의 소녀는 이 악몽 같은 현실에서 생존하기에 합당한, 비범한 자질을 갖췄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로런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는 그녀의 일기를 읽으며 진행되는 스토리를 따라간다. 로런은 차분하고 명철하게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요약하고 설명한다. 로런은 크게 당황하거나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상황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보며,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빠른 상황 판단과 깊은 주의력을 갖춰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한다.
또한 로런에게는 특이한 증상이 있다. 그녀는 ‘초공감증후군’이란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이들의 고통과 쾌감을 공유하는 증상이다. 남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방어할 시, 남에게 고통이 가해지면 그녀도 고스란히 느낀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녀는 적을 공격하다가 똑같은 고통을 받고 위기에 처한다. 안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인데 오히려 주인공에게 핸디캡을 부여했다.
로런이 처한 현실은 열여덟 살 소녀에게 너무 불리한, 지나치게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그녀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일기에서 보이는 로런의 굳건한 의지와 지혜가, 이 현실을 거뜬히 이겨낼 것이라고 낙관했기 때문이다.
로런은 살아남겠다는 생존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 의지는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생존 의지가 아니다. 그녀는 일행들을 배려하고 위한다. 일행을 구하려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또한 로런의 비범함은 일행을 선정하는 데 있다. 그녀는 약자를 돕고, 일행으로 받아들인다. 아이라 해서 무작정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 로런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공동체의 으뜸가는 사명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지키는 것(p571)이라는 사실을. 그렇다고 로런이 무절제한 자비심과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일행의 인선에 유리한 구성을 고려하는, 냉정한 판단력도 지녔다. 위험한 시대, 생존자 집단에 걸맞은 이상적인 리더인 셈이다.
로런에게는 종교가 있다. 목사인 아버지의 종교는 아니다. 그녀는 지구종이란 종교를 믿는다. 사실 이 종교는 그녀가 창시한 것이다. 그녀의 책 《지구종: 산 자들의 책(이하 지구종)》에 의하면, 변화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종이고, 지구종은 지구 생명을 새로운 땅에 퍼뜨리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주는 하느님종이고, 오직 우리(인간을 의미한다)만이 지구종이다. 지구종의 숙명은 별들 사이에 뿌리내리는 것(p135)이다.
로런은 그녀의 종교를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고자 한다. 이 종교로 인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하고 더 합리적인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그녀의 생각과 사고, 계획을 읽으며 든 생각이 있었다. 로런, 네가 정말 열여덟이 맞단 말이니…….
매력적인 주인공 덕분에 즐겁게 읽었다. 같은 디스토피아 장르이자 여성 주인공으로서 공통점이 있는 《헝거게임》의 캣니스가 생각났다. 로런과 캣니스는 같으면서도 다른 매력이 있다.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행동하는 전사라는 점이다. 캣니스 이후로 모처럼,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단권이 아니다. 속편이 있다.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라는 책이다. 전작보다 더 위험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진다고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로런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자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역경을 슬기롭게 잘 이겨낼 것이다. 그녀의 또다른 우화를 기다린다.

덧.
1.
장이 시작할 때마다 한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 삽입된다. 《지구종: 산 자들의 책(이하 지구종)》이란 책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구절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라면 한 번 읽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은 가상의 책이다. 작중에서 로런이 저술한 책인 것. 처음으로 돌아가보니, 저자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로런 오야 올라미나라고.
책 속의 책, 《지구종》의 문구들을 몇 가지 발췌한다.
천재성이란 본질적으로 적응력이자, 집요하고 긍정적인 집착이다. 거기서 집요함을 빼면 남는 것은 한순간의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적응력을 빼면 남는 것은 파괴적인 광신(狂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p7
그대가 손대는 모든 것을 그대는 변화시킨다.
그대가 변화시킨 모든 것은 그대를 변화시킨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로지 변화뿐.
변화가 곧 하느님이다. p8
문명은 지성과 마찬가지로 적응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기도 하고, 적절히 수행하기도 하며, 수행하지 못하기도 한다. 문명이 제몫을 다하지 못하고 내부 또는 외부의 통합된 힘마저 문명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문명은 무너져야 마땅하다. p177
다양성을 포용하라-
단결하라.
(…)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으면 멸망당할 것이다. p345
2.
로런의 세상에서 밀, 옥수수, 호밀, 귀리 등은 품귀 현상으로 가격이 엄청 비싸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토리빵을 먹는다. 예전엔 도토리를 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역겹게 여기기도 했다고 하는데, 달라진 상황에선 도토리빵이 선호 식품이 된 것이다. 현재 검색을 해보니 도토리빵을 취급하는 제과점이 있기는 있다. 물론 이 빵은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설탕과 밀가루 등의 다른 성분을 첨가하여 만든 것일 터. 로런이 좋아하는 도토리빵은 거의 무미(無味)에 가깝겠지.

인상깊은 구절
로런 “대비는 할 수 있어. 그게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대비, 그 일을 끝까지 견뎌낼 대비, 다 끝난 후에도 계속 살아갈 대비. 우린 살아남을 계획을 짜는 데 집중해야 해. 미친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악당,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도자 같은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으려면!” p95
로런 “심연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어요. (…) 이제 내려다볼 때가 됐는지도 몰라요. 느닷없이 떠밀려서 추락하기 전에, 손으로 붙잡거나 발을 디딜 자리가 있는지 확인할 때가 됐다고요.” p116
로런 “변화는 진실이에요. 변화는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변해요. (…) 난 모든 것이 모든 방식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p384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나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