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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온다 리쿠 지음, 이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스프링>을 읽게 된 건 내 나름의 커다란 일탈이었다. 반복되는 것은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삶도 같은 하루의 반복이고 지루함의 대상이라는 걸 깨달으니 무언가 사소한 것 하나라도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난 안전제일주의니까 엄청 대단한 일은 원치 않는데, 뭘 하지. 그러고 보니 요새 읽는 책 장르가 너무 편중되어 있는 것 같은데. 좀 범위를 넓혀볼까. 그리고 우연한 기회가 왔다. 내가 아주 오래 전 놓아버린, 일본 현대 소설을 읽게 될. 당연하지만 그게 바로 <스프링>이었다. 작가는 ‘온다 리쿠’. 유명 작가지만 큰 기대는 없어 굳이 펼쳐보지 않았던 사람. 음, 선로 이탈에 완벽히 알맞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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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은 ‘요로즈 하루’라는, ‘수만 개의 봄’이라는 뜻을 이름 안에 품고 있는 천재 발레리노가 주인공이다. 어린 소년일 적부터 시작해 그가 세계적인 무용수이자 안무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제법 흔한 내용. 책을 열자마자 펼쳐지는 무난한 일상의 이야기들에 역시 괜한 모험이었을까? 후회하게 되겠구나ー 마음속에서 8할 가량의 확신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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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식간에 이 책을 허겁지겁 읽어나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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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새벽 세시 반. 열한시쯤 침대에 누워 책을 폈으니 꽤 오랜 시간을 잠들지 않고 몰입해있었던 셈이다. 웬만하면 없는 일이다. 평소 수면을 돕는 약을 먹고 있는 터라 불가능하기도 했고. 읽고 나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 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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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어떤 인물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는 작품들은 그의 끊임없는 상승이나 하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자는 가벼운 코미디, 후자의 경우는 우울한 타락 또는 억지 눈물을 짜내는 슬픈 스토리.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보통의 것들은 그렇다. 그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니까. 그렇다면 <스프링>은 ‘요로즈 하루’라는 인물을 중점으로 ‘보편적 형식’에 벗어났기에 이런 서두를 꺼내는 것인가? ‘보통의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의도인가? 절반은 틀리고 절반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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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은 주인공 요로즈 하루의 끊임없는 상승을 그린 내용이다. 어딘가 신령스럽고 범상치 않은 소년은 천재이며, 최고의 퍼포먼스만을 보인다. 이 점에서 보편적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점 등장. 전개 도중 관찰자에서 요로즈 하루 본인으로 시선을 전환하게 되면서 그 삶에 접근하고 예술과 창조의 고뇌에 밀착하게 된다. 주변과 사뭇 다른 행동, 그리고 사고. ‘천재’라는 이름에 알맞는 캐릭터가 크랙 없이 자신의 형체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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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많은 작품을 집필해왔던 작가의 노련함이 더해져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발레 무대는 독자를 한 공간으로 끌어당겨 마치 그 순간을 함께하는 것처럼 장면을 생생히 그려내게 만든다. 독자는 그의 사고를 함께 해왔고, 무대 또한 함께 하고 있기에 그의 상승이 단지 가볍고 당연한 행위로만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요로즈 하루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사명이자 ‘의식’을 치를 때는 마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 <블랙 스완>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요로즈 하루는 흑조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파멸하지 않을 테니. 그렇다고 백조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에게 바쳐지는 가장 신성한 새이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과 함께 독자는 무대 위의 물리적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날아오르는 요로즈 하루의 움직임 속에서 혼란을 거듭한다. 검은 어둠과 붉은 경고 속에서 금빛 광휘를 두른 제물이 온몸을 ‘신’에게 바친다. [봄의 제전]이다. 그리고 무대가 끝나면, 관객석으로 돌아와 수만의 봄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황금의 의식을 끝낸 것을 확인하게 된다. 독자는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스프링의 의식이 끝난다. 환상의 시작점에서 현실의 끝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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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교과서에서도 알려주는 이야기의 기본 구조. 그리고 대부분의 ‘천재적인 주인공’이 나오는 각본에서 긍정적 엔딩의 경우, 재능 발현에 어떠한 걸림돌을 마주하고 그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스프링>은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것’은 아니다. 어째서인가? 생각해보건대, 그 이유는 ‘온다 리쿠’라는 관록 있는 작가의 필력에서 유래한다. 그렇지 않고서 가라앉은 공기 속 차오르는 숨 가쁜 생동감을 이리도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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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은 그동안 경험했던 ‘일본 현대 소설’이라는 물건들을 향한 심적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을 경험하게 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모험은 덕분에 대성공으로 끝났다. 아니, 이제 시작이 되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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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이하우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해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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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다. 호흡한다. 늘린다. 뻗는다.
이 순간이 좋다. 몸속 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고요한 빛으로 채워지는 듯한 이 순간이. -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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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기도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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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모른다. 내가 나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내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춤추는 행위가 기도인지, 기도하는 행위가 춤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그 부분은 혼돈에 차 있어서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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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를 온전히 춤출 수 있기를.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춤출 수 있기를. -4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