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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집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우리'의 범주를 인물로 내세운다.
가족, 형제, 연인, 친구.
같은 경험, 같은 공간, 혹은 같은 감정을 공유했던 '우리'는
한 사건 -대부분은 주변인물의 죽음이나 이별-으로 인해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될 수 없는 상황을,
그럼에도 '우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어떤 발버둥을 목도한다.
「우리의 환대」에서는 재현은 아내와 함께 아들을 만나기 위해 호주로 간다.
호주에서 만난 아들 영재는 흑인 노인과 젊은 한국인 여성과 함께 지내고 있다.
과거 아들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폭력을 휘둘렀던 재현은
지금의 영재를 보고, 자신이 아들을 잃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자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들을 잃었음을,
그렇게 '가족'이고 '우리'였던 이들이 완전히 흩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재현은 이제 혈연으로 묶여 있던 영재를 "커다란 창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계다.
창 너머로 영재의 집을,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영재의 새로운 가족을 바라보는데,
"영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영원한 '우리'일 줄 알았던 가족은, 사실 영재에게 우리(畜舍)가 아니었을까.
그건 아마 재현이 영재에게 휘둘렀을 어떤 욕망,
혹은 기억하지도 못할 숱한 폭력이 만들어낸 상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한 사건을 중심으로 흩어지는 관계를 깊이있게 그려낸다.
「폐차」에서는 몸이 성치않은 홀어머니를 동생에게만 맡긴 형이 등장한다.
그런 형에게 찾아온 동생은 과거 폭력적이던 어머니 밑에서 살던 형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의 연대를, 기억을 끌어올리기 위함이 아니다.
동생은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버리고 가려던 그날을,
그 차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던 형 본인을.
작가는 왜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할까.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발견하고,
다른 것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가정에서 자라더라도
완전히 다른 '나'와 '너'가 된 「폐차」의 형제처럼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던지고자 하는 바가
우리는 '구획'일 뿐이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그런 연대의 해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연대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섣부른 '우리'를 지양하자는 게 아닐까 싶다.
「혜주」의 주인공 '나'는 친구 혜주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는다.
혜주는 홀아버지의 병간호를 하고 있고,
연락이 닿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상태다.
나는 "그해 여름을 혜주와 함께 보"낸다.
혜주의 푸념을, 혜주의 고달픔을 듣고 돕는다.
그렇기에 '나'의 입장에서는 혜주와 내가 그 계절을 함께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자신이 혜주의 단 하나뿐인 존재임에 묘한 고양감을 느낀다.
혜주의 일에 조언을 하고 도움을 준다.
'나'는 저들의 일에서 타자임이 분명함에도
'나' 혼자서 '우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감정은 혜주에게도 '나'에게도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돌봄 노동에 지친 혜주는 어느 순간 "네가 뭘 알아?" "뭘 알고 있는데"라고 쏘아붙인다.
그 일을 계기로 '나'와 혜주는 멀어지게 된다.
섣부른 '우리'의 범주화는,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님을 알게 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나도 그랬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가 정말 '우리'일까?
같은 나라에 같은 지역에 같은 공간에 살고
같은 부모를 두고
같은 추억, 기억을 갖고 있더라도
사람은 모두 다른 것을 보고 경험한다.
그렇기에 '우리'라는 단어는
'같음'을 의미하는 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와 나. 그것이 묶여서 우리가 되었다면
너와 나의 개별적인 존재도 인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아도
'내가 모르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으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어떤 상실을 통과하며 받은 썩은 자두를 음식물 쓰레기로 여기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베어 먹는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의 '나'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환대하지 못했던 아이스크림 선물을
한 시절이 넘긴 후에야 먹고 그 흐릿한 단맛을 알게 된 혜주처럼.
완전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 마음을 알아보려고 한다면
상실의 시간을 통과한 후더라도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