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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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소식에 무뎌져 간다는 게 무섭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무고한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경악하면서도, 전쟁이 당장 나의 일상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감각 때문인지 가끔 뉴스를 찾아보는 것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진 못했다. 방위 산업 수출액이 늘었단 기사를 보면서도 수출된 무기가 평화를 위협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전쟁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 책은 계속되는 전쟁의 의미를 되짚고 평화로 이행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사회 상황과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의미를 풀어낸다. 러시아계 한국인으로서 러시아 사회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짚어내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조언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일상화된 전쟁과 무기 경쟁에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평화인지감수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러시아는 옛 소련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 영토를 회복해 자원과 노동력을 획득하려는 제국주의적 의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저자는 푸틴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의 패권을 감지했기 때문에 이번 전쟁을 결정했다고 본다. 즉, 러-우 전쟁은 미-러 사이의 대리전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연관돼 있다. 러시아는 군수 산업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 특수를 이용해 무기 산업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동안 러시아의 무역 이익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러시아 내 극소수에 불과한 좌파 세력, 부족한 계급 의식, 관료 집단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사회적 상황이 러시아의 침략을 가속화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편, 최근 여러 열강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벗어나 전체주의, 보호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일례로 러시아와 중국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인도, 베트남 등 주변 아시아 국가와 함께 서로를 견제하는 파편화 경향을 보인다. 저자는 각 나라가 고립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다극’ 체제를 넘어 ‘무극’ 체제로 이행하는 국면으로 풀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에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여러 열강의 주도권 싸움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전쟁과 군사 제도가 현재의 민주주의나 복지 등 여러 사회 제도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여전히 국가의 서열을 결정짓는 요소는 군사력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냉정한 현실 인식을 요구한다. 전쟁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정부의 신중한 태도가 필수라는 것이다.


  러-우 전쟁의 의미와 국제 정세에 대한 내용 외에도 러시아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비교 분석한 3장의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다. 러시아와 한국은 ‘주변부 콤플렉스’라는 공통된 민족 정체성을 공유한다. 저자는 그 예시로 우리나라가 러시아 교과서에 실린 한국 관련 서술이 너무 짧다고 문제 제기한 사례를 제시하며, 러시아도 미국, 유럽 등 서방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해 서방의 인정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짚는다. 이러한 열등감은 ‘타자’에 대한 민감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피해자 민족주의’가 강해지면 우리 민족이 누구도 침략한 적 없다는 ‘수난사’만이 강조돼 침략을 행한 과거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몰계급적 집단성’만을 내세워 같은 민족 내의 계급 차이로 인한 피해를 감춘다는 점에서 문제다. 일제 강점기 때 많은 조선 기업인이 일제의 침략을 기회로 삼아 이득을 취한 것이 대표적이다.


  푸틴은 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비한국적 조선인 디아스포라 집단에 대해 민족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저자의 질문이 인상적이다. 저자가 예시로 든 재중국 동포에 대한 차별은 물론이고, 총련계 재일조선인에 대한 배제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관련 문화 예술인이나 지원 단체를 제재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난 상황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문제를 성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부 민족 정체성’을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로 확장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안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연대할 때 평화의 목소리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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