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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 마흔에 맞닥뜨린 암, 돌아보고 살펴본 가족과 일 그리고 몸에 관한 일기
김진방 지음 / 따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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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라는 긍정적인 제목이 전하고자 하는 진짜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다만 괜찮고 싶은 거다. 하지만 살아서 괜찮았으면 좋겠다. 책을 다 읽고 기도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읽는 동안 내내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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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로드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2
최예지 지음, 살구 그림 / 폴앤니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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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지하철 6호선 맞은편 자리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쩌다 엿본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하지만 제각기는 특별하고 어느 한조각들은 그저 흘려보내기엔 아프고 억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적당히 비극적으로 흐른다. 잠깐 눈물이 날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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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간
후스크밋나운 지음 / 북레시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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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과 입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상큼하고 재기발랄한 작품들이 소장욕구에 뽐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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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마리아 스토이안 글.그림 / 북레시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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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을 좀 아는 나이가 되어 사회에 나와 내가 정말 놀랐던 건 내가 만난 여성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들은 그러니까, 만일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오히려 비난을 받거나(행실, 화장, 옷차림 등등을 운운하면서) 내 고백으로 인해 듣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거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침묵하기를 강요받으며 자라온 셈이다.

어린 시절 아랫집 오빠에게 성추행 당한 경험을 비롯, 중 2 겨울방학 때 서울 이모댁에 놀러왔다가 처음 타본 지하철 안에서 내 둔부로 밀착해 오던 남성의 발기된 성기로 추정되는 것의 이질적인 느낌, 긴 계단의 반대편에서 스윽 내 가슴을 스치거나 툭 치고 지나가는 낯선 남자들의 손과 팔꿈치, 내가 다니던 여고 앞에 심심하면 한번씩 나타나 자지를 내놓고 흔들다 도망가던 바바리맨,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어귀에서 들려오는 취객의 성적 농담(얼마 줄까? 술 한잔 할래?),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스토커로 바뀌어 날 괴롭혔던 공포스러운 시간들, 자기와 헤어지면 죽어 버리겠다며 부엌칼로 자해 협박하던 오래 전의 한 남자 친구, 이혼한 구남편으로부터 수도 없이 당한 끔찍한 언어 폭력......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빈번한 건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내가 정말 품행방정해 보이지 않아 그러는 건지, 한참 동안 혼란과 수치를 내 운명이려니... 힘겹게 침묵으로 포장하여 꽉 껴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정말 옳지 못 한 것은 침묵이었구나-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내가 그런 고백들을 했을 때, '실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살다가 그런 성폭력의 경험이 전혀 없는 운이 썩 좋은 사람을 발견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진배없을 정도였다. 그녀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잘못한 거겠지, 그냥 똥밟은 셈 치고 앞으로 내가 조심하며 살아야지, 등등의 이유를 붙여 긴시간동안 침묵을 운명공동체로 짊어진 채 살아온 또 다른 나였다.

그러나 비단 이것은 대한민국 만의 문제는 아니다. 밀레니엄을 지나 17년 째를 맞이한 지금 까지도 지구상의 어딘가 에선 종교적인 이유로 아홉살에 강제 조혼을 당해(실질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매매되어) 초야를 치루다 자궁 파열로 죽은 어린 신부의 처참한 이야기를 비롯해, 여전히 할례가 자행되는 국가가 있으며, 각국의 만원 지하철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몇개의 손모가지를 심심찮게 경험하는 장소이고, 데이트 폭력과 강간, 친인척과 같은 가까운 지인에게 당하는 성추행 역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폭력은 어디서나 존재하므로 이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는 일이라며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걸까.

아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불편함을 거부하지 않을 용기를 갖출 때라고. 일테면 '마리아 스토이안' 작가가 쓰고 그린 그래픽노블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를 펼쳐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가며 끝까지 읽는 것과 같은 용기. 그곳에 담긴 이야기들은 나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라서 불편하고, 지금까지 침묵으로 여미며 살아온 시간에 어느덧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건강한 분노다. 이 분노를 에너지 삼아 우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당당히 나누어야 하며, 이로 인해 이어지는 토론들은 분명 또다른 힘이 되어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거라고 믿는다. 안돼!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도와주세요! 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우리가 곁에 있어! 라고 알리는 용기, 그냥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는데! 라며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 말이다.

나는 과거의 그 순간들이 결코 좋지 않았고, 상처 받았으며, 강요 당해온 긴 침묵으로 인해 마음에 딱딱한 딱정이가 졌다. 딱정이를 부러 떼어내는 순간은 몹시 아플 것이다. 새롭게 피와 짓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우리에겐 치유의 가능성과 방법을 공유해야 할 권리가 있다.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의무가 있다. 불편한 이야기를 계속계속 우리가 나누고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마리아 스토이안'의 그래픽노블 <그냥 좋게 받아 들이세요>를 펼쳐도 좋을 시간이다.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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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땅
지피 글.그림, 이현경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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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건 과연 학습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지피 작가의 그래픽노블(그림소설) '아들의 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사랑이 학습이냐 본능이냐를 가르는 것이 포인트는 아니다. 그 의문은 사실 인류에게 사랑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나아가 사랑을 모르는 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또 다른 버젼일지 모르겠다.

그래픽노블이란 참 신묘한 장르다. 칸칸으로 레이 아웃된 만화의 영역으로 보려니 그림 한 컷 한 컷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고, 내러티브의 흐름상 소설로 보자니 이미지가 주는 시적 효과가 매우 짙다. 특히 '아들과 땅'의 경우, 지구 종말 이후의 척박한 삶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가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도 뛰어나지만 연필의 질감과 두께를 생생하게 살린 그림체 또한 몰입을 높여주는 부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 없어도 충분히 의미로운 이야기 일테지만 그림으로 인해 마음으로 스며드는 속도가 달라졌다고 할까.

어느 출판 기념회에서 9살 아들을 둔 한 아빠가 지피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아이가 만화를 지나치게 본다고, 그래서 만화가 없는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고. 이 질문에 대한 지피 작가의 대답이 기막히다.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만화는 없어도 됩니다."

작가에게 있어 그래픽노블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하나의 수단이고, 그에게는 그것이 우연히도 그래픽노블 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음악이나 시 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장 전하고 싶은 하나의 메세지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지구 종말 이후, 비극의 땅에서 두 아들이 살아 나가도록 하기 위해 아비는 두 아들을 생존 본능에 충실한 야수로 키우기로 마음 먹는다. 활자의 존재를 숨기고 감정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금지 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무자비 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행동은 다름 아닌 두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갑자기 죽은 아버지, 두 아들에게 성서처럼 남겨진 활자로 빼곡한 군데군데 눈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얼룩으로 흐려진 아버지의 일기...그러나 두 아들은 일기장을 읽는(해석하는) 법을 모른다. 두 아들은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위험천만한 두 아들의 서사의 끝에 남은 것은 아비가 그토록 금지 시킨 사랑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야 말로 종말 이후의 땅을 아들의 땅으로 바꿀 힘(또는 희망)임을 암시한다. 어둡고 긴 터널을 걷고 또 걸어 저 멀리 간신히 발견해낸 출구의(일지도 모를) 작은 빛처럼. 그리고 두 아들이 발견한 그 빛의 직경이 지금은 비록 작디 작을지라도 나아갈수록 직경의 너비가 커지기를 나는 어느새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들의 땅을 보면서 참 신기한 점이 하나 있었다. 감정의 표현법과 활자를 학습하지 못한 채 야수로 자라난 두 아들의 얼굴이 초반에는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갑작스레 아버지가 죽은 뒤,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이어 나가던 그들의 표정이 점점 풍부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솔직히 확신은 못하겠다. 그건 어쩌면 작가의 의도 였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다만, 두 아들이 그들의 여정을 통해, 비록 그걸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지언정 드디어 발견(학습) 하고만 '사랑'이란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예상해 볼 따름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하여 사랑이 아닐까. 언제였던가 나는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살고싶기에 사람하고 사랑하자-고.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묻고싶다. 사랑은 과연 학습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익명이 주는 소리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21세기의 우리네 삶이 전쟁터라면, 우리가 애써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가장 가까이 혹은 가장 깊숙히 있어 보이지 않던 그 한 가지, 우리가 지금 건져올린 바로 그 한 단어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피 작가는 사랑만 있다면 만화(음악, 미술)은 없어도 된다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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