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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마리아 스토이안 글.그림 / 북레시피 / 2017년 2월
평점 :
세상 물정을 좀 아는 나이가 되어 사회에 나와 내가 정말 놀랐던 건 내가 만난 여성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들은 그러니까, 만일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오히려 비난을 받거나(행실, 화장, 옷차림 등등을 운운하면서) 내 고백으로 인해 듣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거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침묵하기를 강요받으며 자라온 셈이다.
어린 시절 아랫집 오빠에게 성추행 당한 경험을 비롯, 중 2 겨울방학 때 서울 이모댁에 놀러왔다가 처음 타본 지하철 안에서 내 둔부로 밀착해 오던 남성의 발기된 성기로 추정되는 것의 이질적인 느낌, 긴 계단의 반대편에서 스윽 내 가슴을 스치거나 툭 치고 지나가는 낯선 남자들의 손과 팔꿈치, 내가 다니던 여고 앞에 심심하면 한번씩 나타나 자지를 내놓고 흔들다 도망가던 바바리맨,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어귀에서 들려오는 취객의 성적 농담(얼마 줄까? 술 한잔 할래?),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스토커로 바뀌어 날 괴롭혔던 공포스러운 시간들, 자기와 헤어지면 죽어 버리겠다며 부엌칼로 자해 협박하던 오래 전의 한 남자 친구, 이혼한 구남편으로부터 수도 없이 당한 끔찍한 언어 폭력......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빈번한 건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내가 정말 품행방정해 보이지 않아 그러는 건지, 한참 동안 혼란과 수치를 내 운명이려니... 힘겹게 침묵으로 포장하여 꽉 껴안고 살아왔다.
그러나 정말 옳지 못 한 것은 침묵이었구나-라고 여기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내가 그런 고백들을 했을 때, '실은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살다가 그런 성폭력의 경험이 전혀 없는 운이 썩 좋은 사람을 발견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진배없을 정도였다. 그녀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잘못한 거겠지, 그냥 똥밟은 셈 치고 앞으로 내가 조심하며 살아야지, 등등의 이유를 붙여 긴시간동안 침묵을 운명공동체로 짊어진 채 살아온 또 다른 나였다.
그러나 비단 이것은 대한민국 만의 문제는 아니다. 밀레니엄을 지나 17년 째를 맞이한 지금 까지도 지구상의 어딘가 에선 종교적인 이유로 아홉살에 강제 조혼을 당해(실질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매매되어) 초야를 치루다 자궁 파열로 죽은 어린 신부의 처참한 이야기를 비롯해, 여전히 할례가 자행되는 국가가 있으며, 각국의 만원 지하철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몇개의 손모가지를 심심찮게 경험하는 장소이고, 데이트 폭력과 강간, 친인척과 같은 가까운 지인에게 당하는 성추행 역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폭력은 어디서나 존재하므로 이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는 일이라며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걸까.
아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불편함을 거부하지 않을 용기를 갖출 때라고. 일테면 '마리아 스토이안' 작가가 쓰고 그린 그래픽노블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를 펼쳐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가며 끝까지 읽는 것과 같은 용기. 그곳에 담긴 이야기들은 나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라서 불편하고, 지금까지 침묵으로 여미며 살아온 시간에 어느덧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건강한 분노다. 이 분노를 에너지 삼아 우린 불편한 이야기들을 당당히 나누어야 하며, 이로 인해 이어지는 토론들은 분명 또다른 힘이 되어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거라고 믿는다. 안돼!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도와주세요! 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우리가 곁에 있어! 라고 알리는 용기, 그냥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는데! 라며 당당하게 맞서는 용기 말이다.
나는 과거의 그 순간들이 결코 좋지 않았고, 상처 받았으며, 강요 당해온 긴 침묵으로 인해 마음에 딱딱한 딱정이가 졌다. 딱정이를 부러 떼어내는 순간은 몹시 아플 것이다. 새롭게 피와 짓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우리에겐 치유의 가능성과 방법을 공유해야 할 권리가 있다.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의무가 있다. 불편한 이야기를 계속계속 우리가 나누고 읽어야만 하는 이유다. '마리아 스토이안'의 그래픽노블 <그냥 좋게 받아 들이세요>를 펼쳐도 좋을 시간이다. 바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