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산문답
문상오 지음 / 밥북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묘산문답

문상오

 

진득하게 앉아서 소설을 읽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몇 번 읽어볼까 시도는 했으나, 몇 장 읽고 덮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영어 essay를 쓸 때, 원어민 교수님들은 늘 첫 단락의 ‘hook’을 강조하시는데, 그동안 읽은 소설에는 그런 ‘hook’이나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꺼내든 한국 작가의 소설은 달랐다. 소재부터가 달랐고, 캐릭터부터가 달랐으며, 시작이 달랐다. 누구든 이 책의 첫 장을 읽는다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등장동물. 등장동물이라고 써놓은 게 왠지 너무 귀여웠다. 이렇게 소개해주는 것은,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나같은 사람에겐 제격이다. 수시로 앞을 넘기더라도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으니까.

 

책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주인에게 버림받고 인간에 의해 죽을 뻔한 개, 새끼들을 인간의 욕심에 의해 잃은 고양이 등 인간에 의해 다치고 상처받은 여러 동물들이 모여 인간에 대한 복수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책 곳곳에서 인간을 위한 행동이 동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동물들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오는지 등 동물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읽었던 동물이 나오는 책들은 주로 동물을 의인화하여 현실을 풍자한 소설이었다면, 이 책은 조금 더 동물의 관점에서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과 아픔을 드러낸다.

프롤로그에서는 고양이 '방울'이 자신의 새끼들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증살, 그 참혹한 기억. 강렬한 제목만큼 강렬한 내용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프롤로그를 읽으면 누구나 책을 끝까지 읽고픈 마음이 들 것이다. , 동물들의 대화에는 사투리가 나와서 처음에는 책을 읽다가도 멈칫 했는데,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읽으려고 하니 술술 잘 읽혔다. 오히려 생동감이 있었달까? 아무튼 나에겐 무지 새롭고 인상적인 책이었다. 오랜만에 얼른 결말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었다.

 

더는... 더는 인간들하고 엮이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먼 옛날 조상들이 그랬듯이, 대지의 숨결을 따라 바람이 가자는 대로 그냥 떠돌고 싶네. 짐승처럼 사는 인간들 보기도 역겹고.”

-묘산문답

 

인간에게 지쳐버린 동물이 정말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지의 숨결을 따라 바람이 가자는 대로 떠도는 것. 책을 읽다보니 이런 동물에게 공감하며, 그들의 길을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계획을 한 건 회사였겠지. 허가를 내주고 감독을 한 건 정부였을 테고. 굴착기를 들이대고 화약을 설치한 건설업자에, 살충제를 뿌려대고 온갖 장비로 생태계를 교란한 인간들.”

-묘산문답

 

동물들은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누구에게 복수할지 정한다. 그런데, 특정 인물을 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골프장을 짓기로 계획한 회사, 개발을 허가해준 정부, 대지를 파괴하고 화약을 설치한 건설업자, 단정한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잔디를 깎고 살충제를 뿌린 인간. 과연 이중에 누가 죄인일까? 동물들은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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