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는 다수와 주류의 폭력에 맞선 사람들과 함께한 변호사들의 변론기인데, 평소 관심 갖지 못했던 사건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때론 공감하고 때론 분노하며 세상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어떤 양형 이유또한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법정 내면의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 여러 곳 다양한 사건의 경험이 있는 박주영 판사가 판사가 아닌 사람의 시선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판사가 짊어져야 할 무게들, 법의 말과 사람의 마음속과의 갈등. 이 책을 통해 그 고민과 신음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책을 처음 본 순간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양형 이유'의 의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형'이라는 단어를 들어보거나 사용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궁금했다! 프롤로그에서 바로 알 수 있었는데, '양형 이유'라는 것은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판결문은 법적으로 모든 감상은 배제해야 하는 글이다. 그러니 형사 판결문의 '양형(量刑) 이유' 부분만이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것이다. 빡빡하고 딱딱한 법속에서 조금이나마 판사들이 숨통 틀 수 있는 곳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대로 책 속에는 세상에 묻힌 수많은 사건들과 말 못 할 사정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피해자의 아픔에 나도 너무 아팠고, 가해자의 잔인함에 몸이 떨렸다. 화가 났다. 이런 사건을 달고 사는 판사들, 변호사들 등등 관련된 분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건이 크든 작든 그 부담감과 신중은 계속되리라.

 

아무튼 사건에 대한 간결한 소개와 깊이 있는 생각들이 책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평소 이런 책을 읽어본 적 없는 엄마도 몰입해서 훌쩍 읽어버렸다.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가고 이해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나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양형 이유'였다. 중간중간 사건들의 양형 이유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동안 여기저기서 봐온 판결문의 대부분은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딱딱하고 전형적인 느낌이라면, 양형 이유는 정말 사람이 쓴 글 같았다. 다음은 책 속에 소개된 사연 중의 하나인 '선박건조 현장 산재사건' 판결문의 양형 이유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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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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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강조하지만, 우주상에 사람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빈부나 사회적 지위, 근로조건의 차이가 현저한 여명餘命의 격차로 이어지는 사회는 암울하다. 개별 피고인들 전부에게 예외 없이 금고형과 징역형을 선택해 무겁게 처벌하는 이유는, 생명은 계량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함에 있다.

선박건조 현장 산재사건 판결문의 양형 이유 (98p)

    

노동은 신성한 행위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사람의 생명은 하나같이 고귀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아니, 무엇이 더 나은 삶과 행복을 만드는지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노동의 강도가 세고 더 위험할수록 일하는 현장은 더럽고 아슬아슬하며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고 피한다. 이게 현실이다. 나라고 뭐가 달랐을까.

 

위험을 외주화하고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해도 원청업체의 이윤이 늘기만 하면 죽음도 기꺼이 용인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의 죽음을 용인하며 이윤만을 추구하는 연 매출 수조 원의 대기업에 가해지는 형벌이 고작 벌금 1,000만 원이 전부인 나라. 우리나라.

 

이 사실을 이미 수차례 안 바 있기에 이 사연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나에게도 한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돈보다 생명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소중하기에.

 

이 외에도 여러 사건과 판결문 중 양형 이유에 대한 부분을 읽어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당장 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물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역시 무서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온 이 삶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내가 배운 지식과 내가 가진 기술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내게 주어진 힘으로 약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슬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법원. 슬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는 법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판사. 그중에서도 정말 정직하며 현명하고 지혜로운, 그런 사람들.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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