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의 연인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8월 첫 주, 휴가철 떠난 나의 여행지는 대만이었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나라는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게도, 내가 쉴 수 있는 그 날짜에, 갈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항공편이 대만 가오슝으로 가는 거였고, 그렇게 내 휴가지는 자연스럽게 정해졌었다.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차근차근 대만에 대한, 가오슝에 대한 기대는 부풀어 올랐고, 그렇게 나홀로 첫 배낭여행이자, 여름휴가는 가오슝에서 3박 4일이라는 시간동안 알차게 채워졌다.

 

여행을 마친 후, <타이베이의 연인들>이라는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신간이 출판되었다. 난 가오슝으로 다녀왔지만,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로맨스소설은 마치 대만과 나의 사이가 특별해지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매개체로 느껴졌다. 비록 난 가오슝에서 머물렀지만, 가보고 싶었던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를 책으로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로 이야기를 마주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방대한 페이지의 로맨스 소설은 독특한 골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만의 북부이자 수도인 타이베이와 남부에 위치한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을 잇는 고속철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았단 것. 남북을 잇는 고속철도 위에서 달리게 될 열차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본 신칸센이 결정되고, 그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만으로 파견근무를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설의 문을 열었다. 일본 사람과 대만 사람이 일본에서, 혹은 대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매 해마다 세월의 더께처럼 쌓여갔다. 페이지를 넘기는 건 나였지만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시간의 순서대로 지켜보고 있는 느낌, 훔쳐보는 느낌 같은 기분. 끊임없이 각각의 인물들의 내일이 궁금해졌고, 계속해서 그들의 일상이 기대되었다.

 

타이베이로 떠난 여행에서 일본 여자 다다 하루카가 만난 에릭이라는 영어이름의 대만 남자.

파견 나온 대만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 일본 남자 안자이 마코토와 대만 여자 유키.

식민지 타이베이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던 가쓰이치로와 그의 아내 요코, 그리고 가쓰이치로가 사무치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오랜 벗 랴오총.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첸웨이즈와 창메이친, 그리고 그들의 배경이 되어 준 가오슝.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걸었던 가오슝의 길 끝에서부터 철도로, 풍경으로, 사람들로 이어져 결국은 타이베이에 다다르는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루카가 단 하루, 단 한 번의 만남으로 10년 가까이 마음 속에 품고 살 수 있었던 에릭, 즉 로렌하오와 같은 사랑을 나 또한 상상해봤고, 어쩌면 그렇게 마주할 순 없었던 내 인생의 누군가가 또 다른 여행지에서 불쑥, 나를 찾아와주진 않을까하는 지극히 소설스러운 바람도 잠시 꿈꿔보게 된다. 고속철도가 개통된다는 이야기의 틀이 마치 진짜 단단한 철도의 선로처럼 든든하게 소설을 이끌어줄 때, 얽히고 설킨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그 열차 안에서 마지막에 함께 가오슝을 향해 나아갈 때,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했고,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지만 간결했고, 국적도, 등장하는 도시도 꽤나 다양했지만 깔끔했던 이야기. 정말이지 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이런 소설의 틀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뻤던 시간이었다.

 


처음 기대보다 훨씬 더 내 기대를 만족시켜줬던 소설. 요시다 슈이치의 <타이베이의 연인들>은 그 누가 읽더라도 흐뭇하고 감사한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 접어둔 페이지

 

 

-36쪽


냉방이 너무 강한 사무실에서 ㅏ온 다다 하루카는 7월 타이베이의 강렬한 햇살을 온몸에 들쓰며 "아, 기분 좋다"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좋은 기분은 오 분도 채 안 가서 그다음은 고양이처럼 그늘을 찾아 걷게 되리라는 걸 알지만, 그런데도 냉장고 같은 사무실에서 나온 이 한순간만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다.


-72쪽


"가고 싶어?"

그가 영어로 물었다. 하루카는 그 말과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발에 남아 있던 국수를 서둘러 먹어치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옆에 세워둔 스쿠터를 가리켰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는 아디다스 운동복 바지에 목둘레가 살짝 늘어진 파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랫동안 빨아 입어 낡은 티셔츠였고, 아직도 세제 냄새가 풍길 것 같았다.

우연히 재회한 사람이긴 하지만, 타국 땅에서 낯선 남자의 권유에 응해 스쿠터에 올라탄 이유를 한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하루카는 아마도 그 티셔츠 때문이었다고 대답할 것 같았다.

 

 

-367쪽


하루카는 조용히 호흡하는 안자이를 바라본 후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생각해보면 타이완에 온 지 어느새 사 년이 넘었다. 하루하루의 업무에 쫓겨서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 사무실의 분위기도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변했다고 꼭 짚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일본에서 가져온 시간의 흐름이 어느덧 이곳 타이완 시간의 흐름에 천천히 동화됐다고 말하면 좋을까. 아무튼 밖에서 소나기를 만나도 한동안 처마 밑에서 비를 그으면 그만이다 싶은 여유가 모두에게 자연스레 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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