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섬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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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준에서는 꽤 오랜 시간 책을 읽지 않았던 지난 한 달 반의 시간. 여행 준비하랴, 퇴사 준비하랴, 여유를 가지고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이게 한동안 뜸했던 독서에 대한 첫 번째 변명이고, 두 번째 변명을 굳이 붙여 보자면 읽고픈 책이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터.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은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그러니깐 얼른 읽어줘야 할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들 중에서 역순으로, 그러니깐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집었다. 읽어야 해서 읽는 책 말고 읽고 싶은 책을 간만에 만난 그 반가움 때문에.

 

 

그렇게 만난 책이 이경자 작가의 <건너편 섬>이다. ‘여성의 근원적 상처와 고독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된 짧은 문구 가운데서 ‘여성’이라는 단어에만 초점을 맞춘 채 읽었다. 여자의 이야기, 여자의 입장에서, 여자가 바라보는,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겠구나 싶었다.

여성이 쓰는 여성의 이야기는 어떨까. 남성들 앞에 맞서는 페미니즘적인 글이거나 아니면 여성이라서 유독 잘 느낄 수 있는 지독한 감성소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알이 굵은 이야기가 아니라 촘촘한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고, 수록된 8개의 이야기가 모두 비슷한 듯 다 달랐다. 저마다 다른 깊이로 감동을 안겨줬다. 나 또한 여자여서 유난히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소스들도 구석구석 찾아볼 수 있었다.

 

 

<건너편 섬>을 읽으면서 각각의 이야기가 ‘뒷심이 세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수록된 8개의 단편 가운데 적어도 6편 이상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물 흘러가듯 읽고 또 읽다가 마지막 문단에서 ‘쿵’하고 뜨거워지는 감동들. 그런 게 느껴지니깐 다음 이야기, 또 다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 뒷심을 기대하게 됐다.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중 하나는 세 번째 이야기인 ‘언니를 놓치다’다. 전쟁 중에 헤어진 언니와 이산가족상봉의 기회를 통해 다시 만났던 여동생. 하지만 분단되고 얼굴 못 보며 지낸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가져다 준 차이는 너무 크고 깊었다. 감정적으로 언니를 대하고 싶은 동생과 달리 언니는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기에 바빴고, 가족의 정보다 그 가족에게 내가 잘 지내고 있는 이유가 나를 둘러 싼 국가라는 껍데기였음을 고백하는데 급급했다. 이별했고, 다시 만났고, 눈물 흘리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자매의 만남을 예상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이어 ‘박제된 슬픔’이라는 다음 이야기를 읽으며 한 번 더 분단된 현실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읽어 보니, 어쩌면 이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이 상황이야말로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 여섯의 여름을 지나면서 스물 다섯의 여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이 책을 작년에 읽었더라면 아마 지금의 내 감정만큼, 지금의 내 이해만큼의 깨달음은 분명 느끼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녹록지 않은 삶을 조금 더 경험하며 살아왔고 그 축적된 경험 덕분에 이 짧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아픔을 조금은 더 끄덕거리며 읽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삶은 녹록하지 않으며 반복되는 고민 속에서, 하나씩 그 고민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에 ‘하루치의 위안’을 얻으며 산다는 생각을 했다. 이경자 작가가 만들어 낸 각각의 인물은 분단의 아픔을 느끼거나 혹은 이혼의 경험을 가졌거나, 또는 남편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치욕스럽고도 비밀스러운 상처를 간직하고 있거나, 홀로 남은 인생 속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스스로를 마주해야 하는 묘한 고통스러움을 누렸던 적이 있었다. 내가 이해하는 것이 그들과 온전히 겹치는 동일한 경험들은 아닐지라도 인물들의 상황을 내 상황인양 가져와 느끼며 읽으니 이경자 작가의 뒷심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던 걸까? <건너편 섬>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일컫는 말은 아닐까. 나라는 ‘섬’말고 내가 바라보는 또 다른 각각의 섬들, 그 모든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인생’을 보여준다. 이경자 작가의 주변에 있던 이 섬, 저 섬들 말고 내 주변에 있는 이 섬, 저 섬들을 관찰해보자. 분명 녹록지 않은 누군가의 삶을 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 끄덕거려줬던 것처럼 가까운 이들의 아픔에도 끄덕거려주고 싶은 그런 날이다.

 

 

 

 

 

 

책속 밑줄 긋기

 

 

 

58쪽 - ‘미움 뒤에 숨다’ 중에서

승용차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가부장들. 그들의 존엄은 임금(임금)인가,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보장되고 확인되는 권력인가? 존엄과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그가 감춘 비애나 치욕감은 술집이나 연인만이 위로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너무 늦게 아버지의 감추어진 존재감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와 자식인 우리와 아내인 엄마 사이엔 친구 같은, 동지 같은 유대감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24쪽 - ‘이별은 나의 것’ 중에서

28년 살림을 끝냈을 때, 저절로 배워진 것 한 가지가 있었다. 사람 사는 데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딱 필요한 것만 가질수록, 놀랍게도 주변이 풍성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겼던 남편과도 헤어질 수 있고 남 보기에도 균형을 맞췄던 가족이 흩어졌는데 여벌의 그릇이며 가구며 살림살이가 무슨 대수인가. 결국 우리 모두 죽음으로 헤어진다는 걸 일상으로 간직하면, 모든 탐욕이 짐이었다.

 

 

257쪽 - ‘건너편 섬’ 중에서

그런데도 그 여자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베란다에 서서 어둠에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흔들의자를 떠올리거나 동이 트는 보랏빛 여명을 바라볼 때 할머니를 떠올리면 울컥 가슴이 미어졌다. 정(情)은, 서로의 마음을 흔들어 마음이 굳지 않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것도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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