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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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 박범신, 소소한 관계가 실은 말하고자 한 것




1.


이 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독백을 통해 존재의 가치와 익숙한 관계를 뛰어 넘는 초월적인 관계의 유무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초로의 작가 박범신은 마치 자신이 말을 하듯 분신 같은 화자를 한 명 만들어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등장시켰다. 하지만 길고 긴 이야기를 주도하는 메인 화자는 ‘ㄱ’으로 정의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이 소설의 시작이기에, 그래서 그 상황을 설명해주는 화자는 박범신을 닮은 노작가지만, 진짜 이야기의 시작은 그 다음부터다.

‘혼 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더 좋아’ ‘셋이 사니 진짜 좋아’로 구성된 3장의 이야기에서 ㄱ은 ㄴ과 ㄷ이야기를 꺼냈고, ㄴ은 ㄱ과 ㄷ이야기를 꺼냈으며, ㄷ은 ㄱ과 ㄴ의 이야기를 꺼냈다. ‘덩어리진다’는 다소 모호한 단어를 줄곧 써대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거울 같고 분신 같은 존재인지를 묘사하고 있었다.
박 범신, 어려운 고어들을 써가며, 어려운 문장을 구사하며 전체적으로 이 책을 ‘어려운 책’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작품은 독자가 마주하기엔 사실 좀 부담스러운 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해보려고 내 나름 노력했던 건 ‘마지막 페이지’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 세 명의 기구한 만남이, 그리고 이성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을 떠나 1:1로 맺어지는 각각의 관계 속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런지가 제일 궁금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정리되가는 그들의 관계를 알아가는 건 어려운 문장들 속에서도 내 흥미를 끌어올려 준 좋은 동기가 되었다.

실용서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등장인물이 수십 명에 달하는 대서사시도 아닌, 단 3명의 주거니받거니하는 이야기들이 전부인 책이지만, 그래도 너무 어려운 감이 있어서 종이에 끄적거려봤다.











인물을 정리했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봤고, 그렇게 해본 결과, ㄱ과 ㄴ과 ㄷ이라는 세 사람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 ‘하트’를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다. ‘셋 이서 사랑했으니 그건 우정이 아닐까요’라고 묻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작가가 주장하는대로, 그리고 끝까지 읽어본 바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들 속에는 우정보다는 사랑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은 좀 독특했다. 초월적인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존재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 뭐 그런걸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2.


소 설을 읽으면서 영화 <몽상가들>이 떠올랐다. 끝까지 본 영화는 아니고 대략적인 줄거리만 알고있는 작품인데, 남녀의 수만 다를 뿐, 세 사람이 공유하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큰 틀은 통하고 있는 것 같다. 남자라서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여자라서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닌. 하나의 '대상'으로써 사랑하고,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서로가 하나가 되었다가, 또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으로 각각 살아가다가, 자신의 연약한 부분들을 가지고 만나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그런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소한 풍경>속 ㄱ과 ㄴ과 ㄷ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싶다.








3.


플 라토닉 사랑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라는 물음으로 토의를 가졌던 적이 있다. 소설쓰기 수업이었는데 소설가가 진행하는 수업에서 어느날 플라토닉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주제가 던져졌고,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더 많을,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그간 당신들이 겪었고, 또 들었던 다양한 정신적 교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모였던 10인 안에서는 ‘플라토닉 사랑은 가능하다’라는 의견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 속에서 그려진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는 '질투'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ㄱ으로 정리되는 '나'가 ㄴ과 ㄷ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ㄷ이 ㄱ와 ㄴ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분노'하지 않았다. '질투'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둘만의 공간에 '나도 들어갈래'라는 말은 뱉었지만 결코 그 단어가 둘 중 한명을 미워해서,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던 건 결코 아니었다.

플라토닉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지 꽤 되어 가물가물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열띤 토론이 다시금 생생해졌다.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만큼은, 박범신 작가가 그려내려던 게 흔한 에로스적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발췌>



오빠 때문인지 그의 누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흰 운동화-갈색 구두로 이어지는 비의적인 동행의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긴 팔이 슬며시 뒷덜미를 지나와 반대쪽 어깨에 얹힐 때 플루트 연주가 뚝 끊기고 봄비 소리만 가슴으로 막 들어온다. 그는 내게도 죽은 오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오빠-누이동생의 우연한 부합은 너무도 신비하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내 눈빛에 깃든 죽음의 이별을 한순간 느꼈을 수도 있다. 직관은 사실의 눈을 뛰어넘으니까.
49쪽






“이 주름 사이로 때로는 바람이 지나가는 게 느껴져.” 그의 말소리가 들린다. 그가 자신의 이마에 놓인 가로 주름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거짓말!” ㄷ이 키드득 웃는다. 2층 베란다에서 내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당이다. 강이 오늘따라 가깝게 다가와 보인다. “정말이야. 지금도 그런걸. 바람이 이 골짜기로 지나가고 있어.” 그가 부연하고, 그녀가 한 손으로 그의 가로 주름을 툭툭 친다. 오누이 같다. “그럼 이 주름들, 바람의 길이네!” 그녀가 계속 웃는다.
65쪽






“내가 그동안 수십 권의 소설을 썼으니 얼마나 플롯에 질렸겠냐. 플롯이란 한마디로 인과론(因果論) 같은 거 아니냐. 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죽는다면 소설은 그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 원인의 진술에 바쳐지는 것. 그리고 인과론은 당연히 시간의 꼼꼼한 관리로써 미학적 균형을 얻는다. 그게 플롯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고 있는 게 작가라고 여기는 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야. 작가들은 관리자에 가까운 표정을 갖고 있어. 정말 지겹다. 자유로워지려 쓴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쓰면 쓸수록 부자유해지는 이 갑갑증, 얼마나 환장할 일이겠니.”

“물론, 플롯 없이 쓰는 게 가능할까 생각하면 머리가 더 아프다. 딜레마야. 하기야 뭐, 소설 쓰기만 그런 건 아니겠지. 우리 모두 근본적인 지향은 자유일 텐데, 삶에서나 사랑에서나, 사람들은 플롯을 만들어 씌워 구조화하려고 평생 안달하거든.”
94쪽




우물에게는 비밀이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거대한 비밀이지요. 내가 딛고 선 굳은 땅 밑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의 물이 흘러 나가는 구부러진 강이 있으며, 그 강은 또 다른 수많은 지류로 이어져 있다고 상상하면 늘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내가 내 힘으로 작두샘의 손잡이를 움직여 그 거대하고 신묘한 비밀을 지상의 한낮으로 퍼 올리는 거지요.
비밀이 없는 세상은 사막처럼 황막할 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단지 사막에 있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아름다운 건 아닐 거예요. 다른 종족에게는 비밀로 해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더욱 아름다운 거잖아요.
155쪽




그 녀는 감성적인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인 나를 한 단계 끌어올려 음악의 깊은 안뜰로 인도해준 가이드이자 친구, 혹은 그 이상이었어요. 화성학이나 간단한 작곡법 또는 프로듀싱하는 법 따위를 가르쳐준 것도 그녀였지요. 그녀를 사랑했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랑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을 나는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갖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천연스럽게 상대편을 장난감처럼 자주 취급하면서, 그것에 대한 아무런 깊은 성찰도 갖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부서지지 않는 장난감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러므로 사랑은, 두려워요.

모든 사랑에는 그런 위엄이 다 깃들어 있어요. 훼손하기 위해 욕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도 많아요. 예컨대,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는 세계 전부를 잃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존중해야 할 아무런 가치도 남겨 갖지 못했어요.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지요. 내 존재 자체가 돌이킬 수 없도록 훼손된 것이었어요. 아버지와 형을 사랑했기 때문에 얻은 결과예요.
179쪽





봄은 천 개의 빛깔을 갖고 있어요.
기 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밉고 죽고 싶고 미치고 싶은 그 모든 감정 말이에요. 희로애락과 애오욕이 요지경처럼 뒤섞인 채 다가와 우리들 마음을 천 갈래로 흩어놓는 것이 봄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건 그날의 햇빛과 천 갈래 봄빛 때문에 비롯됐었다고.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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