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 탈근대의 서사와 담론 청동거울 문화점검 43
박진 지음 / 청동거울 / 200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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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북소녀님께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신 책, 나는 일단 내가 모르는 책을 접하면 읽은이의 후한평에도 불구하고 일단 나스스로 그책이 나랑 맞는지 확인을 해본다. 그건 간단하다. 인터넷서점에 검색해서 도서정보 보고, 서평 한두개 대충 훑어보면 이게 나랑 맞을 책인지 아닌지 느낌이 온다. 악평이라 하더라도 나랑 맞는 코드의 책도 있다. YES24에는 후기가 없고, 알라딘에는 뒤북소녀님의 후기만 달랑 있었다.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놓고 재미없으면 반납하면 되지만, 구입을 해야 하는경우는 좀 신중해진다. 제목부터 풍겨오는 냄새가 먹물냄새가 서울인터넷도서보관창고에서부터 솔솔 풍겨오지 않는가. 그런데, 뒷북소녀님이 두번 세번 쉬운 책이다라고 강조하신 말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장르문화 자체를 좋아하고 특히 짬뽕장르에 대한 이야기라면 귀가 솔깃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헉!!!! 대학논문에서나 보는 딱딱한 인문학적 글들의 남발!!! 하지만, 그 충격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금방 재미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개념자체에 대한 설명을 할때는 추상적인 언어들로 도배를 하지만, 실예로 드는 것들은 내가 익숙하게 접하는 영화와 애니와 소설들이다보니, 표현하는 언어는 일상어가 아니지만 그안에서 박진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면으로도 해석할수가 있구나 하면서 나의 생각의 폭을 확장시키는 즐거움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읽고 싶은 소설이나 보고싶은 영화가 많이 생길수도 있다. 나또한 책속에 예로 든 책들의 제목을 나의 목록에 추가를 시켜놓기도 했다. 책뒤편에 보면 활용한 논문이나 서적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 그걸 접하면서 이 글쓴이는 자신의 언어로 소화를 해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많은 생각꺼리를 던져주고 단순히 하위장르로 폄하되는 짬뽕장르의 심오함과 다양한 해석의 길을 열어주는 재미있는 책이라는걸 알겠는데, 표현을 그렇게 딱딱하게 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쓸수도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문헌의 책들로 공부할겸 나의 책 목록에 추가를 시켰는데, 그 다양한 문헌들을 읽었다면 거기서 사용한 표현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썼겠다는 나만의 신빙성(?)가지 않는 추측마저 들었다.
 

  뒷북소녀님의 말처럼, 책은 읽기가 쉽고 재밌다. 특히 대중문화를 즐기는 이들중에서 좀더 다양하게 즐기는 법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재미가 있을거 같다. 그리고 인용의 예들이 대중문화들이라 알아듣기가 쉽다는거다. 


  나는 대체 역사물의 메타적 자의식이라는 소제목의 "메타적 자의식"이라는 뜻은 모르겠다. 물론 그안의 내용은 알아듣기 쉬워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스팀펑크(증기기관이 나오는 과거의 과학문명사를 다룸), 슬립스트림(SF보다는 문학적인 비중을 더 준 작품-예, 박민규, 서준환, 조하형 등등), 리보 펑크(사이버 펑크+생명공학)등의 용어를 꼭 알고 그구분을 할줄 알며 대중문화를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저자가 소개하는 다양한 해석방법을 이해한다면 대중문화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다양하게 즐길즐 아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는것이다.


  세개의 장으로 나뉜다. 1.팩션물과 역사 서사물 2. SF서사물  3. 공포 서사물


  요즘 팩션소설이 유행이다. 그현상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나름의 고증과 논리를 가지고 소설을 시작한다면 우리에게 또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 학자가 아닌이상, 우리는 그 많은 역사를 알고 책을 접하진 않는다. 내가 읽은 책안에서 작가가 주는 답을 정답으로 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내에서 역사의 진실을 정의내리는것. 이것이 팩션 혹은 역사 서사물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객관적일수없다. 역사 기록자의 주관이 배여있고, 권력자들의 역사를 다루고 그들의 악행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역사는 정사와 야사를 고루 접하면서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존의 권력자들에게 속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야비한 짓과 패자들의 역사를 숨긴 역사를 우리는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구일수도 있는 팩션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팩션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팩션류는 우리 독자를 역사학자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요근래 팩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까닭은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역사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에서 주어지는 역사만 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 우리스스로 역사가가 될수 있도록 다양한 길을 열어주는 팩션에 대한 열풍은 좋은 현상이 아닐까...
 

  SF 서사물은 철학적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내용으로 갈리는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간의 역사를 볼때 디스토피아에 더 개인적으로 끌린다.  스팀펑크의 담론으로 애니메이션 <스팀보이>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인용한다. 둘다 문명의 양가성을 다루고 있지만, 문명을 비판하면서 화려한 영상미를 보여준다는것은 그 비판의 강도를 약화시킨다는 이야기를 새롭게 들었다. 광주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신 이들이 있을것이다. 비슷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려한 휴가를 보면 그날 그때의 충격적인 영상들만 보여준다. 비평가들이 많이 했던 비평들이 광주항쟁의 본질을 그 끔찍한 영상이 가려버린다는 요지의 평론이었다. 그 비평도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화려한 휴가>라는 충격적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 했다는것으로도 나는 또 다른 가치를 주고 싶긴하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인간중심의 사고를 벋어나서 문명을 타자화(객관화 시킨다는 말. 거리를 두고 쳐다본다는 말)시켜서 생명론적 우주론적 관점에서 문명을 비판하기에 <스팀보이>보다는 문명의 비판에 대한 깊이가 다르다는 말을 한다.
  SF 제패니메이션의 하이브리드화. 뭔말인지 모르겠다. 예로 <카우보이 비밥>을 드는데, 검색을 해보니, 궂이 SF 제패니메이션의 "하이브리드화"라는 말을 쓸필요가 있나 싶다. 다양한 장르와 짬뽕학!! 이렇게 표현해도 될것을... 이야기의 요지는 <카우보이 비밥>이 다양한 장르와 결합이 되고,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있다는 말이다. 에피소드 하나하로써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캐릭터들마다 플래시백장면을 자주 활용하면서 개인사를 담고 있고, 호러와 미스터리, 갱스터와 필름 느와르(우리나라에서 뮤지비디오로 활용되었던 끝편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멜로 드라마와 추리물등 다양한 장르가 자유롭게 뒤죽박죽하고 있다. 읽는 이가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수 있는 작품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스파이크와 제트)와 미래에 대한 낙관론(페이와 에드)이 충돌하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과학문명뿐만 아니라 근대세계에 대한 반성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다.
  슬림스트림의 예로써 작가 박민규, 서준환, 조하형, 백민석의 소설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내가 왜 박민규의 작품에서 흥미를 못느끼나 이해할수있었고, 서준환의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과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과 백민석의 <러셔>와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은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작품이다.
  리버펑크는 사이버펑크+생명학을 말하는데, 이 현상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에 시사점이 크다고 할수있다. 인간의 휴머니즘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실험하고 조작하는것이 과연 옳은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런 윤리적 문제에서 인문학서적들이 간과하는것이 있는데, 만약 자신이 그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죽을 병이 걸렸는데 나는 돈이 많고 머리 없는 아들의 복사품을 제작할수있는 여건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인간의 복제물들의 인권도 있을것이고, 인간을 벋어난 타생명체의 인권도 있을것이다. SF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로봇의 인권도 100년 후쯤이면 만날수있지 않을까? 로봇의 인권을 주장하다가 인간에 의해서 공격을 당한 로봇이 인류를 멸먕시키는 이야기는 <매트릭스>의 전 이야기를 다룬  <애니매트릭스>에서 확인할수 있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풀루토>또한 인간과 로봇사이의 갈등과 로봇의 인권을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만화책이라는걸 느낄수 있다. SF라는 장르는 여름 성수기를 겨냥한 블록버스터만을 흔히 생각하는데, 진정한 SF장르는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골치아프게 던지는 어려운 놈이다.


  세번째 공포 서사물. 공포라는 장르는 내안에서 보기 싫은  형태를 알수없는 그 무엇을 괴물로 형상화 시켜서 그들을 쳐부수고 살아남아서 극장밖을 나와서 안도감을 안겨주는 장르이다. 공포라는 장르가 다루는 것을 잘 살펴보면 사회속에서 억압받고 배척되고 혹은 두려워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괜히 싫은 아이가 있다. 이유도 없다. 이유없이 밉다. 그래서 괴롭히고 싶기도 하고 파괴시키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자신안에서 인정하기 싫은 혹은 감추고 싶은 그 무엇을 그아이에게 투사화 시켜서 그것을 타자화 시키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유없이 싫거나 이유없이 두려운 존재를 만나면 나는 나자신을 들여다 본다. 공포서사물에 대한 평론들을 접하다 보면 "타자화"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페미니즘이론을 공부하다보면 한국 공포, 귀신이야기를 통해서 타자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자신을 타자화 시킨다는것은 내 영혼이 내 몸 밖으로 잠시 나와서 멀리서 자신을 개관적으로 들여다본다는 말이고, 약자혹은 소수자를 타자화 시킨다는것은 그들을 배척하고 억압하려는 의도이다. 한국 공포영화를 예로 들면서, 권력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한 것은 참 흥미로웠다.


  글을 읽고 나면 재밌게는 읽었는데, 글로쓰기엔 남감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건 일상적인 용어들로 서술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런 인문학적 서적들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자신의 언어로 써보는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책속의 내용을 그래도 옮겨 요약하기보다 그냥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만 적어보는것. 그게 자신의 언어로 소화하는게 아닐까. 나도 "타자화"라는 개념은 처음엔 아주 낯설었다. 그러나 영화평론이나 페미니즘으로 보는 대중문화에 대한 글들속에도 이 타자화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했었다. 자주 접하다 보니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야할까. 자기내면을 성찰해보는 의미로 활용되기도 하고, 억압받는 약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꺼낸다는것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접하면서 내언어로 소화한  "타자화"에 대한 나의 짧은 견해이다.


  글로 쓰기 어렵다 하더라도, 하위문화로 폄하받는 다양한 장르를 즐길수있는 방법들을 여러가지로 제시해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자기언어로 소화하고 표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텍스트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줄 아는 능력을 늘려나가는것도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 유효하다. 그렇다고 귀가 너무 얇은것도 안좋다. 자기 줏대로 질겅질겅 씹으면서 귀를 열어두는것, 그게 자신만의 텍스트 해석방법의 독특함을 키워주는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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