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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70만부 기념 에디션)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언어의 온도를 영화에 비유하고 싶다.
이 책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화양연화 같은 영화처럼
전개가 느리지만 깊게 스며드는 영화일 것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프레임 하나하나가 숨결과 체온을 지니고 있다.
화려한 사건 대신, 오래된 골목의 가로등 아래서 우연히 스친 어깨, 녹슨 철문에 기대어 들려오는 작고 맑은 목소리, 그리고 그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하게 만드는 미묘한 시선의 교차가 주인공.
이 영화의 카메라는 말보다 침묵을 오래 담았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한참 동안 흔들리다 사라지는 순간,
당신은 스토리가 아니라 온도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이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몇 초의 장면이,
온 대사를 대신해버리듯.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관객은 ‘결말’을 기다리지만,
감독은 해답 대신 여백을 관객에게 건넨다.
화면엔 창밖 비 내리는 거리와, 빛에 번진 한 문장이 흐른다.
“말에는 온도가 있다.”
그 문장은 중경삼림 속 주인공이 파인애플 통조림 유통기한을 세던 장면처럼, 일상의 사소함 속에서 예고 없이 찾아와 마음에 깊게 각인된다.
영화관을 나설 때, 관객은 줄거리를 기억하기보다,
장면의 촉감과 목소리의 질감을 더 오래 붙잡는다.
언어의 온도는 그렇게, 결말보다 여운이 먼저 따라오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