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교과서 시에 눈뜨다 - 고등 국어 교과서 문학 읽기 10
김상욱 엮음 / 상상의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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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의 몰락이 표나게 하소연되던(/는) 시절, ‘○○ 읽어주는 ◇◇’라는 명찰을 단 유령이 떠돌고 있(/었)다. ○에는 그림이나 클래식 음악, 영화 등이 들어가고 ◇에는 남자나 여자, 아니면 교수라든가 철학자 등 저자의 권위를 앞세워 돋을 새겼다. 이 중, 문학에 한정해 보면 ○에는 ‘시’, ◇에는 ‘(문학)교수’를 대입한 책이 시와 대등한 하위갈래로 일컬어지는 소설이나 수필 들을 압도했다. 이들 눈물겨운 계몽주의자들의 기획 의도는 ‘이 책을 읽으면, 당신도 시를 읽을 수 있다’쯤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 해설은 그들이 다룬 시 못지않게 휘황하고 모호하여, 시 읽기를 더욱 신비주의로 고착화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 내곤 했다. 요령부득의 전문적 언사(言辭)에 겁먹은 독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눈을 멀게 할 것 같아, 차라리 눈 감고 아는 길이나 더듬어 다니는 청맹과니를 자처하게 되었다.  

 

이 책―김상욱 엮음, 『국어교과서 시에 눈뜨다』(상상의힘, 2011)―은 ‘시는 어디에 서’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통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고민의 결실이다. 그래서 글 전편에서는 각자의 현실과 삶의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두 시 읽기의 ‘방법을 사용할 용기’(칸트)를 갖게 하려는, 참된 계몽성으로 무장한 엮은이의 일관되게 견결한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시 읽기, ‘시에 눈뜨’기, 그것은 특정인들의 ‘특별활동’이 아니라는 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시를 읽을 때에는 언제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렇게 표현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되뇌면 된다. 그리고 질문에 나름대로 답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애초에 정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더욱 적절한 탐구와 다소 적절하지 못한 탐구만이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일관된 해석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라면 자신이 던진 질문에 자신이 이해한 깊이만큼 대답해 나가면 된다.”(286면)1)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따뜻하고 화창한 휴일이다. 나는 어서 이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아내와 아들을 꾀어 공지천까지 걸은 다음, 옛 에티오피아 노상찻집 앞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조금 더 걸어 시립도서관에 가 몇 종의 2011년 봄호 계간지를 훑어보려 한다. 이게 휴일의 날씨를 읽고 난 나의 반응(/‘대답’)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렇게 표현하였는가, 라는 질문’은 ‘시를 읽을 때에’만 써먹는 비술(秘術)이 아니다. 나는 쉼 없이 ‘시를 읽’고 있는 중이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데리다)듯이 우리에게 세상만사(世上萬事)․삼라만상(森羅萬象)․천산만락(千山萬落)․만학천봉(萬壑千峰) 모두가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나는 컴퓨터 앞을 서성거리는 중3짜리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유난히 시끄럽게 설거지하는 맞벌이 아내의 다음 페이지를 예측해야 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정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소년과 아내가 그들의 ‘무엇’을 음성(/문자)적으로 언(어적)(현)한다 해도 꼭 그것을 정답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나는 아비와 남편이라는 ‘일관된 해석’의 잣대로 그들의 언행이 제기하는 ‘질문’을 다시 나에게 던지며 내가 ‘이해한 만큼 대답(/반응)해 나가면 된다.’ 나는 쉼 없이 ‘시를 읽’고 있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건 시를 읽는 일이건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조금 독특한 양식일 뿐이다.  

 

“… (시는 하나의 게임) … 사실 시는 한 편 한 편이 모두 저마다 다른 게임입니다. 농구의 손과 축구의 발은 각기 동일한 함축적 의미를 갖습니다.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요한 신체 기관’이란 점에서 같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농구의 ‘발’과 축구의 ‘손’ 역시 같은 함축적 의미를 갖습니다. 똑같이 ‘반칙’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달라지면 규칙도 달라지고, 동일한 단어라도 서로 다른 함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53면)  

 

올해 들어 가장 따뜻하고 화창한 휴일, 나는 독후감을 마무리 짓지 못할 수도 있다. 혼자서 공지천을 걷고, 소년과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에스프레소를 마시거나, 혼자서 시립도서관에 다녀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혼자서라도 그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란 법은 없다. 각각의 시가 그렇듯이 삶의 매순간이 게임이기 때문이다. 모종의 반복되는 규칙성을 띠되, 매트릭스(/경기) 안에서의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 나는 지금 컴퓨터가 놓인 거실과 주방이 건네다 보이는 방에서 독후감을 쓰며 선제공격을 할지 방어 태세를 갖출지를 가늠하고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모두 저마다 다른 게임’이듯이 일상의 하나 하나가 모두 게임인 것이다. 나는 쉼 없이 ‘시를 읽’고 있는 중이다.  

 

 

2.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가 16종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중․고생이 읽어야 할 현대○○ ◇◇편’류의 책들이 차고 넘친다. 언죽번죽 자극적인 책띠를 두르고 낯 뜨거운 호객 행위를 꺼리지 않는다. 구매자의 지혜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 책도 내게는 그 시장(市場)에서 유통되는 품목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이와 유사한 짜임새의 책으로 그의 작품 해석에 호감을 갖고 있던 나는 ‘또?’ 하는 시큰둥함으로 ‘책 구경’을 시작했다. 앞서 나온 책에서 다루었던 작품들이 이번 책에서 ‘또’ 다루어진 부분―국어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들은 엮은이의 저서에서 다루었던 작품들과 겹친다―을 우선 훑었다. 그런데, ‘또’가 아니었다. 엮은이는 모든 작품들을 ‘다시’ 읽은 것이다! 그의 감상문에는 자기복창(自己復唱)이 없다! 이것이 이 ‘물건’을 골라 읽은 첫 번째 이유였고, 그 선택의 기준은 어긋나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은 『문학이론입문』에서 자크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의 주체 이론과 ‘문학’2) 사이의 유사점을 제시하면서 리얼리스트와 모더니스트의 글쓰기 방식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김상욱의 이 책이 여타의 시 해설서와 차별화되고 독자들에게 유력하게 호소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일관되고 어기차게 모더니스트의 ‘글쓰기 방식’(엮은이의 세계관은 일관되고 어기찬 리얼리스트로 보인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지만)을 견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타의 시 해설서들은 ‘언술하는 행위, 즉 무엇이 어떻게 말해지는가나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해지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무엇이 말해지는가, 즉 언술된 내용 자체에로 향’해 있었다. 그들의 해설은 ‘익명적인 언술’이나 마찬가지여서 ‘법률서류나 과학교과서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책이 그 사람을 말해주지 못했다. 독자 쪽에서 보자면 그들의 해석이 ‘애초에 어떻게 거기에 담기게 되었는가를 독자들이 모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큰 권위를 가지고 … 심지어 독자들을 겁주기까지’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텍스트상의 사실이 선택된 과정이나 배제된 내용, 그리고 선택된 사실들이 왜 이런 특수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는가 하는 이유, 이 과정을 지배한 전제들, 텍스트 형성에 사용된 작업 형태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들을 독자가 알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책들의 번들거리는 광휘는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는가를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상욱의 이 책은 작품의 해석과 감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실제 내용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엮은이는 자신의 해석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자연적 기호처럼 스스로가 의심할 바 없이 자명한 것인 양 행세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또한 그가 별로 호감을 갖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해석)을 구성하고 있는 장치(device)를 드러내’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석은 독자와 작품 사이의 게임이기에 자신의 해석이 ‘절대적 진리로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는 자신의 해석이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가 비판적으로 반성해서 이것이 완전히 다르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고무’한다. 왜냐하면, “황지우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시는 언어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물을 보는 관점의 문제인 것이”(119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중․고생에 앞서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들이―시 읽기가 삶 읽기라는 이 책의 논지로 본다면 굳이 ‘국어’교사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선―읽어야 할 책 목록의 맨 앞자리에 ‘마주앉은 고독’(니체)처럼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긴다.  

 

모티브motive는 작품 자체를 있게 만든 동기를 뜻하고, 모티프motif는 이야기 장르에서 ‘서사의 최소 단위로서의 화소’를 의미한다. … 작품 창작의 모티브, 창작된 작품의 모티프, 이렇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195면)  

 

국어교사들에게 이 책은 그들의 어기찬 시 수업의 ‘모티브’가 되어주면서 이 책 자체가 우량(優良)한 문학수업의 유력한 ‘모티프’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곧 만나게 될 『시와 만나다』, 『시가 말을 걸다』, 『시와 함께 놀다』라는 책들과 만나, 말을 걸고, 함께 놀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2011-0313)



1) 면수만 제시된 것은 모두 김상욱 엮음, 『국어교과서 시에 눈뜨다』(상상의힘, 2011)에서 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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