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가 없다면 판단을 유보하도록 훈련받지 않는 한, 인간은 독선적인 예언자들에 의해 잘못된 길로 이끌릴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지도자는 무지한 광신자이거나 부정직한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은 어렵지만, 대부분의 미덕은 불확실하다. 모든 미덕을 배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배우는 데 최고의 훈련은 철학이다.

하지만 철학이 긍정적인 목적을 수행하려면 회의주의를 가르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교조주의자는 해롭지만 회의주의자는 쓸모 없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와 회의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인 철학이다. 교조주의는 아는 것을 확신하고, 회의주의는 모르는 것을 확신한다. 철학이 해소해야 할 것은 지식이나 무지에 대한 확실성이다. 지식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크든 작든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동시에 우리는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최선의 가설을 유일한 신앙처럼 떠받들지 않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반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즉 동일한 해악이 반대 가설에서도 똑같이 확실하지 않는 한, 불확실한 가설은 확실한 악을 정당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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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철학이 보수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대개 언어적 문제일 뿐이다. 어떤 오래된 문제에 대해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 발견되면, 새로운 지식은 ‘과학’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철학’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후대 과학자들에게 철학자들이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가설을 제공했다. 우리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이 부분적으로는 과학이 아직 검증할 수 없는 일반 가설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설이 검증되어 사실이 되면 이제는 과학의 일부가 되고 ‘철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의 유용성은 우리가 정해진 시간 내에 과학으로 확인되거나 반박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추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밝혀낸 것에 너무 감명을 받아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잊어버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과학이 밝혀낸 것보다 밝혀내지 못한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아서 과학이 이뤄낸 성과를 과소평가한다.

과학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만과 확신에 차서 과학 연구에 필요한 명확성이 결여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실용적인 문제에서 기술이 지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최신 기술로 서로를 죽이는 것이 낡은 방법으로 서로를 살리는 것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낫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과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고대의 해로운 미신으로 되돌아가며, 과학 기술이 널리 사용된다면 인간 행복이 증진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개탄스럽다. 과학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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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도덕 과제 중 하나는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는 얼마만큼의 돈과 시간 또는 관심과 감정 에너지를 써야 하는 걸까?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는

"세상에는 도덕이 지나치게 많다. 자력구제를 통한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저지른 모든 살인과 종교 전쟁과 혁명 전쟁의 사망자, 피해자 없는 범죄와 일탈 행위 때문에 처형된 사람, 이데올로기적 집단 살해의 피해자를 다 더하면, 틀림없이 도덕과 관계없는 포식과 정복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많을 것이다."12 역사학자 헨리 애덤스Henry Adams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Robert E. Lee와 관련해서 이 부분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해로운 짓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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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받은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중, 연민, 친절, 관심을 원한다. 공감은 어떨까? 공감도 원할까? 그들에게 공감이 도움이 될까?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메아리처럼 반복하지 않는 의사가 나를 돌봐주니 고마웠다. 그러나 공감이 없었다면, 그 의사는 내가 고맙게 생각한 그런 돌봄을 제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두려움에 대안을 제시하고, 정보와 지침을 제공하고 나를 안심시켜서 두려움이 줄어들도록 도우려면, 그는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를 꿰뚫고 있어야 했다."30
나도 여기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관심과 이해가 중요하다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의사나 치료사가 환자의 감정을 ‘꿰뚫지’ 않고도, 다시 말해 환자와 감정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유지될 때 둘 모두에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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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친화성이 높은 사람과 (부정적인) 경직된 친화성

공감은 선량한 사람들을 더 선량하게 만든다. 친절한 사람들은 고통을 좋아하지 않고, 공감은 고통을 눈에 띄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약 사디스트의 공감능력이 올라가면, 그는 더 행복한 사디스트가 될 뿐이다. 만약 내가 아이의 고통에 무심하다면, 아이의 울음은 나를 짜증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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