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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봄, 결혼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친구로 지낸 시간이 벌써 이십 년이 됐지요.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이 결혼할 때는 축의금만으로는 도저히 보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소중한 친구들이 결혼할 때면, 편지를 써서 건넸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난 친구들이 공항에서, 호텔 침실에서 편지를 읽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올 때가 되어서야, "아, 이제 보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3월에 결혼한 친구에게는 함민복 시인의 <부부>라는 시를 적어 보냈습니다. 긴 상을 두 사람이 함께 들고, 문을 넘어 한 발씩 걸어가는 모습으로 부부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아낸 시입니다. 사실, 이 시는 다른 친구가 <말랑말랑한 힘>을 먼저 읽고서 알려준 것인데,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결혼 축하 편지에 이 시를 옮겨 적으며, 조만간 시집을 구해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시간은 벌써 반 년이나 지났고, 이제야 읽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글은 어렵지 않습니다. 꾸미지도 않고, 담백한 낱말로 바둑판의 급소를 찾아 고요하게 톡. 내려놓습니다. 글의 흐름도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소리내어 읽을 때 더욱 와닿기도 합니다. 몇 편의 시를 빼놓고는 시인의 생활에 착! 붙어 있는 삶이 느껴집니다. 한두 편의 시는 사회와 세상의 흐름을 놓지 않고 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까요. 외유내강 강화도 딸각발이 타입입니다. 시집의 제목도 "말랑말랑한 힘!"
시집은 네 가지 주제로 묶여 있습니다. "길, 그림자, 죄, 뻘". 함민복 시인은 모든 존재에게 '길'이 있다고 설명하고, 모두가 각자의 길을 걷지만 그 길 역시 크게 보면 하나의 커다란 길의 일부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길
식물들은 살아온 몸뚱이가 가본 길이다
그도 죽어 길이 되었는지
골목길에 검은 화살표로 이정표를 남겼다
두 번째 주제는 '그림자'입니다. 시인은 그림자를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허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존재의 염원과 본질이 투영된 것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소외된 사물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그 그림자에 따뜻함을 불어넣으려 노력하지요.
그리움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세 번째 주제는 '죄'인데, 이 부분은 사회비판적인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천둥소리>로부터 시작해서, <큰물>까지 이어지는 열다섯 편의 시는 현대인의 삶을 비판합니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파괴하고,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파괴하면서 '말랑말랑한 것'들을 죄다 '딱딱한 것'들로 바꾸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시인은 살아있는 것들은 말랑말랑하다고 말합니다. 죽은 것들이 딱딱한데, 우리의 삶도 딱딱해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
딱딱하고 뜨거워지는 공기를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다
<감촉여행> 중에서
네 번째 주제는 '뻘'입니다. 시인은 강화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죄'에서 딱딱한 것을 고발하고 '말랑말랑한 것'을 네 번째 주제에서 찾아내는데, 그게 바로 '뻘'입니다. 뻘은 액체같은 고체 상태이기도 하고, 시커먼 우주처럼 먹먹해보이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고, 딱딱하게 만들어 높이 세우는 것은 언젠가 흐리멍텅해지고 허물어집니다. 혼자만 곧추 서는 삶이 아니라, 뻘밭에 여기저기 뚫려 있는 숨구멍마다 생명이 숨쉬고 있는 것처럼 넓다란 평면에서 말랑말랑하게 살아 있는 게 진짜 힘이라고 읊조립니다.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보통 시집의 뒤편에는 시인이나 비평가들의 평론이 실립니다. 주로 적극적인 찬사가 대부분이지만,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좀 달랐습니다. 끝에 실린 글이 시인의 산문입니다. 이 시들이 어떤 생활을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시 같은 산문'으로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습니다. 제목은 <섬이 하나면 섬은 섬이 될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섬이 하나, 아주 거대한 섬이 하나면 호주처럼 '대륙'이 됩니다.
아래에 인용한 부분을 읽기 위해 이 시집을 사도 아깝지 않을 듯합니다.
태양에서 떨어져 나와 나무 속으로 들어간 빛들이 태양을 그리워하며 하늘 쪽으로 가지를 뻗어 올립니다. 나무들의 모양, 꽃들의 빛깔들이 다른 것은 태양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살구나무 가지에서 떨어진 풋살구가 살구나무 가지 쪽으로 튀어오르고 침묵 위에 떠 있던 말들이 침묵 속으로 다시 녹아드는 것도 그리움의 한 표현방식일 것입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은 다 섬이며, 섬엔 그리움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