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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ㅣ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평점 :
어떤 물건은 마음 한 켠에 사람이 되어 자리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화장품을 바르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았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립니다. 축축한 왼쪽 머리카락을 잡아두기 위해 무심히 꽂는 '까만 집게핀'은 제 아내입니다. 혼자 있을 때,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까만 집게핀을 보면, 아내가 마음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 집게핀은 "젖은 머리에 꽂고, 거울을 보며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는 아내"의 모습이 있는 기억의 방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존재를 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군가는 자신과 닮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자신의 상징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글, 그림, 음악과 같은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상징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서시>는 윤동주를, <진달래꽃>은 김소월을 불러내는 것처럼요. 제게는 우리 시대 시인을 여는 열쇠 몇 개가 있습니다. <상처적 체질>은 류근의 문짝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정호승의 대문을, 그리고 <선천성 그리움>은 함민복의 문을 두드립니다.
대표적인 시를 접하는 일은 정말 쉬워졌습니다. 스마트폰과 감수성 풍부한 사람들 덕분에, 인터넷으로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시를 접하기는 쉬운데, 시집을 손에 쥐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서점에서 시집 한 권을 사는 일이 사뭇 낯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얇아서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펴보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운 좋게 마음에 쏙 드는 시가 있어서 읽고나면, 얇고 짧은 책에 돈 쓰기 아까워집니다. 간사한 마음. 그런 이유로 이제야 이 시집을 만났고, 읽었습니다.
이 시집은 함민복 시인이 1996년에 엮어낸 책입니다. 먼저 읽었던 <말랑말랑한 힘>이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보다 훨씬 전에 쓰인 시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블랙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을 본 뒤에, <레옹>의 그녀를 본 것 같은 느낌. 깊은 담백함이 지금의 함민복 시인이라면, 이 책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예리하게 갈고 닦은 감수성으로 말라낸 언어들이 꿈틀댑니다.
가장 처음에 실린 시가 <선천성 그리움>입니다. 그리워서 껴안았지만, 심장은 영원히 포개지지 않을 운명입니다. 죽고 다시 태어나도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당신이 멀리 있고, 그 사이의 모든 공간이 온통 그리움입니다. 함민복 시인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먹먹하게 만들어 놓고, <가을>과 같은 한 줄로 마음줄을 튕겨버립니다.
시는 태생이 마음의 말이라, 시인의 속내가 짙게 담깁니다. 사람과 사랑,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낮게 읊기도 하지만, 시인으로서 삶을 굳게 지탱하려는 마음도 내비칩니다. 자신의 '쓸모'를 생각하며 궁핍한 생활인의 모습을 고백하면서도, 결코 긍정적인 시각은 잃지 않습니다.
시인에게 인세가 생활의 소금이 되기도 하고, 시인이 쓴 시가 독자의 마음에 소금이 됩니다. 겨우 인세 몇백 원, 한 권에 몇천 원짜리 짧은 글들이 삶을 윤기나게 만들어 줍니다. 올 가을에는 시집을 사서 누구에게라도 선물해야겠습니다. 가을 햇볕 담은 시집으로 시인의 삶에도 소금치고,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에도 소금을 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집이 꽂힌 책장에 제 모습이 앉아 있기를 소망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