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 정지인 옮김.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p.251, 데우스 엑스 마키나
예전,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대략 이런 말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짜증'이란 낱말을 못 쓰게 한다. 작가는 감정의 결을 다듬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짜증'이란 단어는 감정을 뭉뚱그려 버린다."
학생들은 욕을 많이 쓴다. (다행히, 구리고 학생들은 남학교이지만 적게 쓰는 편이다.) 욕을 하는 그 순간에는 '속이 시원'할 수 있다. 그러나 욕은 '짜증'이란 단어처럼, 자신의 감정을 우그러뜨려서 쓰레기로 만든 뒤에 입 밖으로 배출해버린다.
그리스 희곡에서 복잡하게 전개되는 극의 갈등을 갑자기, 단번에 해결해버리는 존재가 있다. 기계를 타고 무대 위로 강림하는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위의 두 사례는 '기계신'이 현실에 강림하는 모습이다.
이 책의 핵심은 인용한 부분이다. 물고기인 "어류"는 분기학 상, 하나의 '범주'로 인정되지 않는다. 물속 환경에서 나름대로 적응에 성공한 포유류, 유제류(발굽을 가진 동물) 등의 복잡성을 인간의 직관으로 분류해버린,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개념어였다.
사람은 복잡한 걸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아니, 사람의 뇌가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원형(프로토타입 또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고, 사물을 그것과 비교해서 분류한다. 그런 뒤, 그 분류를 '믿고' 견고화시키며, 다른 사례는 무시(하거나 예외로 처리)한다.
저자인 룰루 밀러는 과학의 비호 아래에서 활동했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그 기계신의 우수 신도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를 다룬다. 미국 작가답게, 자신의 신변과 생각을 버무리면서.
자연과학은 자연물의 사실을 다뤄야 한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릇된 가치판단과 신념을 가지면 어떤 재앙이 현실을 파괴하는지 서술한다. 모든 생명체가 적절한 관계에서 서로 빛난다는 주제가 이 책을 가치 있게 만든다.
다만, 진짜 핵심을 말하려고 어찌나 미국식으로 독자를 빙빙 돌려대는지. 책의 중간까지는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멀미처럼 치솟았다. 꿀꺽꿀꺽 멀미를 삼키며 다 읽어낼 가치는 충분한 책이었다.
(멀미를 피하려면 '9. 세상에서 가장 쓴 것'부터 읽어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