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안보윤 외 지음, 이혜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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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나는 창비 미디어 교육의 소설은 뭐랄까, 마치 "옜다 읽어봐라. 여기서 맘에 드는 작가 한 명 못 만나나 보겠어!" 하는 느낌이다.


매월 책 자체를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그 안을 꽉 채운 소설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우와, 이건 꼭 소장해야 한다고!!!"를 외치는 것 같다.


이번 「공존하는 소설」에서는 나의 최애 서유미 작가의 이야기가 있었고(물론 예전에 벌써 다 읽어본 타르트 ^^) 최은영, 조남주 작가의 팬들도 기꺼이 행복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번에 처음 보는 소설가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존하는 소설」이 뜻하는 바를 조금씩 알게 되었으니 이른바,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함께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코로나는 단순히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것만이 아니다. 사회를 통제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도 모자라 강한 사람은 더 강해지고 약한 사람은 더 약해지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았다. 운이 좋았다면 코로나 시대에 별다른 일 없이 단지 코로나 감염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을 테지만 운이 나빴거나 혹은 생계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본 사람이라면 단절된 사회를 더욱 외롭게 느꼈으리라.



「공존하는 소설」은 학대받는 아이, 외국에서 일하러 온 불법 근로자, 이제 막 서울로 독립을 시작하는 지방러, 동성을 좋아했던 학생, 치매가 오는 엄마를 바라보는 사람 등 특수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이른바 사회가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감싸줘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작가 당 한 편씩의 글이 묶여 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전체적인 소설 흐름이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막상 책을 펼쳐 읽어 보면 우리 주변에서 가까이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가 한 권의 소설 흐름으로 자연스레 묶여 있다.


결코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한껏 흡수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에 속해 있고 한 사회는 국가에 속해있다.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혼자서 산다고 외쳐도 우리는 결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고 이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하다. 뉴스에서는 연일 묻지마 살인과 폭행을 다루고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의무가 바뀐 세상에서 혼란스럽다. 그러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아니면 이 책이라도 읽어보시길.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약한 구석이 쓰여 있고 그것을 서로 바라보며 품는 사람은 또 다른 약자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p36. 밤은 내가 가질게


네가 학부모에게 아이 발달 사항을 설명하고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주면 가끔 선생으로 인정받을 때도 있겠지. 근데 그게 너를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 사람들은 서비스 받는걸, 과도하게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그러니까 원생이든 선생이든 누가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내라고 난리를 피우는 거지. 우리 근간은 서비스직이야. 거기까지만 생각해.



학대받는 주승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인 '나'는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얻는 칭찬이 어색하다. 자신은 선생으로서 그 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서비스직의 개념으로 한 일이라는 걸 본인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다. "나는 주승이 선생님이 아니에요.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이었던 적이 없어요. 나는 그냥"


처음부터 '나'가 그랬던 건 아니다. 선생님이라는 명칭 속에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 하지만 몇몇 개념 없는 부모짓에 짓눌리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이라는걸.


이런 '나'의 곧은 마음에 균열을 내는 건 늘 순진하고 착해빠져서 사람들을 쉽게 믿는 언니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기를 당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진저리 치는데 어느 날 언니가 유기견을 데려와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또 한 번 화가 난다. 도대체 책임감 하나 없이 불쌍하다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까지 또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p46 밤은 내가 가질게


언니가 말했다.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거. 그래서 내가, 아직 상냥한 채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거. 그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공존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상냥함'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줄 줄 아는 마음 같은 것.


정확한 형태는 모르겠지만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따뜻해지고 스스로에게 미소가 지어지는 상냥함.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상냥함인 것 같다. 다들 특정 주제에 예민해져 물어뜯고 공유하며 서로 낄낄대는 마음이 자칫 농담이란 한 단어에 쉽게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상냥한 건 쉽게 나올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본인이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진실한 마음을 쥐어짜내어 상대에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이다.



미주는 주나와 진희와 고등학교 친구였다. 일종의 베스트 프렌드여서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만나면 재밌고 그 어떤 세상에서 그들만 있으면 행복했다. 어느 날 진희가 자신은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한 말에 주나는 "정말 역겹다"라는 말 한마디를 내뱉고 그 자리를 떠났고 미주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교복 치마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날 이후 진희는 세상을 떠났다.



p119 고백


시간을 되돌려 어느 한순간으로 갈 수 있다면 그때로 가고 싶다고 미주는 간절히 생각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고. 나는 너의 편이라고 말할 거라고. 너를 그렇게 외롭고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때의 미주는 더듬거리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희는 역겹다 말하며 돌아선 주나에게도 슬펐겠지만 아무 말 하지 못한 미주의 행동에도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보다는 슬프고 외롭게 그 길을 친구들과 헤어지며 돌아왔을 때 아마 친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어도 "괜찮아. 우린 네 편이니까"란 단 한마디의 상냥함만 있었더라면 진희는 덜 외롭지 않았을까.


「공존하는 소설」에서 사회적 약자에 노인을 포함시켰다는 건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미래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고 치매는 사람을 걸러 오는 게 아니니까. 백은 빌딩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경화는 그 옆 낡은 상가가 없어지고 새로운 요양원이 크게 들어선다는 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당장 아이들이 공부하는 환경인데다가 왠지 요양원은 그 동네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혼 후 아이를 키우며 함께 돌봐주시던 친정어머니가 치매가 올 위기가 되자 돌연 요양원이 꼭 생겨야만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전에는 내게 독이라고 했던 존재가 지금은 득이 되었고 사회적 약자로 돌아선 순간의 양면적 마음이 나쁘지만 않게 보인 건 우리들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아이가 없던 여성이 마음대로 식당을 다녔다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난 뒤 노키즈존이 이렇게 많았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처럼 사람의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고 사회적 약자로 두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p205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


경화도 백은빌딩 옆에 요양원이 들어오는 것은 싫다. 적당한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주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렇다. 신념도 좋지만 집값도 땅값도 만만치 않은 서울 한복판에서 요양원과 데이케어 센터를 운영하는 게 수지 타산이 맞는 일인가.



가난, 여성, 노인, 아이, 비정규직, 지방

위의 단어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되뇌어도 비슷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이다.


소수자 혹은 약자로.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한 세상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신도 해낼 수 없는 일은 사람이 해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우리가 인간이고 최소 교육을 받고 말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이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몫을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존하는 소설」은 단순히 소설로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만나고 그 속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아직 가닿지 못한 상황을 미리 살아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큰 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언제든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상냥함으로 서로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안전하다는 걸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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