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감옥 - 시대와 사람, 삶에 대한 우리의 기록
이건범 지음 / 상상너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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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 들으면 넋 나간 소리 같겠지만, 한 때 나는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혀 징역을 산 '빵잽이' (전과자를 부르던 속어)에 대한 기묘한 열등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 말대로 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20대에게 징역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낙인을 찍고 존재를 갈아타는 환승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그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뒤꽁무니에 붙어 다녔는데, 어찌어찌 별 탈 없이 20대를 넘겼다. 기득권을 포기하지도 않았지만, 고 채광석 시인의 말마따나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 소리만 흉내 내다' 말았다는 죄책감과 열등감도 오래 잊히지 않았다.

저자는 그처럼 내가 경외를 품고 바라보던 '빵잽이'였다. 저자 이력을 보면 경외감은 더 커진다. 혁명을 꿈꾸다 두 번의 옥살이를 한 뒤 창업하여 연 매출 100억 원 대의 기업을 일궜으나 12년 뒤 쫄딱 망했다. 눈이 나빠져 1급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도 지난해 600쪽 넘는 '좌우파사전'을 펴내고 한국출판문화상을 탔다. 그런 사람이 쓴 '내 청춘의 감옥'이라......인간 승리의 비장한 이야기일까?

웬걸, 신세 망쳤다는 영탄이 뒤덮어도 시원찮을 감옥이 배경인데 이 책엔 '변형 바이러스'같은 웃음이 넘쳐난다. 저자는 엄숙한 정치범 사동에서 스포츠지 구독을 시작으로 물을 흐리더니, 잡생각을 물리친답시고 '수학의 정석'을 풀던 '범생'과 급기야 지루박 스텝을 밟는가 하면, 요리법 개발 경쟁을 벌이다가도 만두를 빚어 교도관까지 한 밥상에 둘러앉아 조촐한 한 끼를 같이 먹는다. 저자가 그 안에서 칼을 만들지 않나, 종이로 문짝과 빗장까지 달린 장롱, 선반, 책상을 만드는 장면에 이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상상력을 발휘해 징역의 칙칙함을 벗겨내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함께 웃을거리를 찾아내던 저자의 징역살이를 키득거리며 읽다 보니, 묘하게 요즘 청춘들, 무슨 '투쟁'이니 하는 살벌한 단어 아래에서도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춤추며 놀 줄 아는 아이들이 머릿속에 오버랩 됐다. 그렇지......쇠창살보다 더한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가둘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웃음. 그게 청춘이지.

그렇다고 설마 20대에 치른 두 번의 옥살이가 마냥 가볍기만 할까. 하고 싶은 일은 떠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아야 할 삶' 10년 청춘을 걸었는데, '동지'들은 떠나갔고 저자는 1.4평 안에 갇혔다. 증오와 고통은 가장 먼저 자신의 표정부터 일그러뜨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떠난 이들을 미워하던 자기 마음의 밑바닥부터 직시하는 힘겨운 작업을 비켜가지 않았다. 흰 벽을 바라보며 홀로 목놓아 울던 숱한 시간을 보낸 뒤, 저자는 "고통을 끌어안는 법", 남에 대한 미움 또는 자책으로 치닫지 않고 고통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만만치 않은 고난을 겪었으면서 "삶이 나날이 흥미롭고 즐겁다"고 말하는 저자의 힘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유쾌하면서도 때론 울컥해지는 책을 덮으며 저자가 보여준 웃음의 힘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불친절한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가볍게 웃으며 세상을 통과하기, "세상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행복은 아주 짧게 스쳐갈 뿐"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은밀하고 뜨겁게 꿈틀거리며 강한 힘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 짧은 행복의 기억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그리고 계속 웃기. 그가 감옥에서 배웠듯 "웃음의 가벼움이야말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므로.

그나저나 다 읽고 나니, 오래 전에 잊었던 '빵잽이'에 대한 열등감이 다시 살아난다. ,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인 줄 그 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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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현대성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차원현.채호석.배개화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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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이상..뜬금없는 '주연여배우'가 나와 원문보니 필리핀의 이멜다(leading lady)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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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달려라 - 지식공작소 마라톤 7
존 빙햄 지음, 홍은택 옮김 / 지식공작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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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까지만 해도 내게 달리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과 담을 쌓고 산데다 중고교시절 오래 달리기조차 한 번도 완주해본 적이 없는 내가 달리기라니...하지만 지금은 10km 대회를 완주한 경험이 있고 하프 마라톤을 뛰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1시간을 지속적으로 달리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다. 그래도 나는 주제넘게 스스로를 '러너'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달려라'는 문지방을 넘기가 망설여지는 순간부터 결승점을 통과하기까지 내가 달리면서 겪었던 모든 감정의 굴곡과 의식의 흐름을 내가 자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게다가 유머러스하게 묘사해준 것 같은 책이었다. 꼭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어야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달리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 실패의 잔재들로 이뤄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본 사람들,'안된다'와 '해야 한다'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라면,나처럼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길에 은유한다면,그 길을 달리는 태도를 성찰한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쉬운 문체로 사유한 인문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매번의 달리기가 늘 기쁘지 않다.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한 뒤 나는 더 나아지지 않는 것에 노심초사했다.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인내심이 약한 스스로를 나무랐다. 변화에 대한 저항은 지금도 끈질기게 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자신의 최상이면 된다'는 저자의 글을 반복해 읽으며,나는 내가 겪은 경험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됐다.

같은 코스를 같은 속도로 달려도 모든 달리기는 다 다르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번의 달리기는 좌절과 권태,절정과 기쁨의 순간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한다. 그 어떤 체험도 영속되지 않으며, 내가 밟지 않은 앞길에는 지금보다 덜하지 않은 선물 혹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당신의 최악이 당신의 최상과 마찬가지로 순간에 불과하며 당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해방시켜줄 행위'라고 말한다. 요는 '과정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기쁨은 달리는 행위에 있고,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 있다.

올 봄 10km 대회를 완주했을 때가 내 딴에는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고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처음엔 초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식 속에는 온전히 달리는 행위만 남게됐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에고와 집착을 버리고 공허와 터무니없는 기쁨, 더 큰 힘과의 조화속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계속 달리는 일 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힘들다'고 느꼈던 그 때보다 나는 지금이 더 힘겹다. 앞으로도 계속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의 최상이 되라'는 저자의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내가 통과한 결승선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기억한다면,'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뒤 그래도 나아지지 못하는 것들과 화해하는 법','나의 과거와 맞서 거둔 사소한 승리를 자축하는 법','뒤뚱거리며'나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물론이고, 매끄러운 번역으로 귀한 책을 만나게 해준 역자에게도 감사한다. 자신의 선택을 담담히 들려준 역자 후기를 읽으며, 이 책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졌던 또 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안타까운 것은 책 겉장 디자인의 조악함이다. 말줄임표를 넣어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제목 디자인과 난삽한 겉장만 보고서는 선뜻 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저자가 누차 강조했듯 '달리기는 속도나 기록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길'임을 말하는 책의 표지에 왜 목각인형이 달리는 그림을 넣었을까? 이해가 되질 않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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