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밀키웨이 > 우리 정서를 그리는 그림 작가 이억배



고속도로를 벗어나 안성 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이정표를 읽습니다. 좌전, 원삼, 용담 저수지, 고삼, 서삼……. 이억배 선생님 사시는 곳, 풍정 마을이 점점 가까워 옵니다. 산모롱이를 돌아 풍정 마을 입석과 급히 눈인사를 나누고 마을 고샅으로 들어섭니다. 언덕처럼 나지막한 산 옆에 선생님 사시는 집이 있습니다. 환히 웃으시며 마당으로 나오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수원 살다가 풍정 마을로 삶터를 옮긴 지 사 년 되었다는 선생님 집 마당은 어디 한 군데 허술한 데 없이 잘 손질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집을 가꾸고 삶을 가꾸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딸 한솔이의 작품과 가족 신문이 붙어 있는 마루에 앉아 역시 그림책 작가이신 정유정 선생님께서 내 주신 차를 마십니다. 두 분 선생님의 정겨운 미소와 따스한 햇살이 알맞춤하게 퍼지는 마루가 편안합니다.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글을 쓰고 그린 『솔이의 추석 이야기』의 주인공이던 한솔이는 벌써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고,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종익이는 봄이 되면 3학년이 됩니다.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그대로 있는데 주인공이었던 아이들은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갑니다. 두 아이 모두 학교에 다니니 학부형으로서 걱정이 많은 선생님 부부와 저 또한 학부형으로서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주고받다가 작업실로 자리를 옮깁니다. 작업실 들어가는 문에 글라데스코 물감으로 선생님이 그린 호랑이 한 마리가 눈높이에 맞추어 앉아 있습니다. 호랑이는 퉁방울 눈을 뜨고 장난스레 입을 벌리고 그 방이 ‘이억배 정유정 작업실’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선생님 얼굴 가득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라 있는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작업실 문을 열자 널찍한 마루 바닥 왼쪽으로 나지막한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꽂이 널을 지탱하는 기둥에도 선생님이 그린 닭 두 마리가 장난스레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책꽂이 위 한지로 바른 벽에는 새벽을 알리는 늠름한 수탉이 담장 위에 서서 인사합니다. 1997년에 그린 도서관 그림은 책을 사랑하는 작업실 주인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옆에는 방문이 있고, 또 책꽂이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온 벽 가득 책이 꽂힌 책꽂이입니다. 직접 마름질하여 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은 사랑을 듬뿍 받아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

책꽂이 옆에는 선생님의 보물 창고인 오래 된 장롱이 있습니다. 장롱 문을 열면 켜켜이 지른 선반 위에 그림책 원화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맨 아래 칸에는 선생님의 그림책과 그 그림책으로 만든 기념품이나 인형 등이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는 세상에서 더 소중한 보물이지요. 『솔이의 추석 이야기』에 나오는 솔이 인형도 누워 있습니다. 미국에서 책을 번역하여 출간하면서 만든 인형이지요. ‘Make Friends around the World’라는 시리즈로 나온 그 책은 미국의어린이에게 우리 문화를 소개했을 터이지요. 인형 솔이는 선생님의 딸 한솔이가 입었던 돌복을 본따 만든 색동 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한솔이의 돌복을 미국에 보내 주어 만들었다는 색동 저고리와 치마는 안타깝게도 서양식으로 마름질이 되어 우리 한복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했다며 정유정 선생님께서 안타까워하십니다.

보물은 옷장 속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방을 작은 공간과 큰 공간으로 나누고 있는 책꽂이 옆의 서랍장 안에도 보물이 꽁꽁 숨어 있습니다. 열 다섯 단이나 되는 널따란 서랍장 안에는 한지와 수채화 종이 등 여러 가지 종이가 종류별로 들어 있기도 하고, 최근에 그린 그림책의 그림, 그림책을 만들기 전에 고심한 흔적인 스케치와 더미 책들과 행사 때 그렸던 포스터 그림들, 자료 슬라이드들, 인상적인 장면을 그려 둔 그림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보물 서랍에서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의 더미 책이 나옵니다. 처음에 만든 더미 책에서 주인공 수탉은 마을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골목길 끝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의 풍경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골목길의 선이 살아난 장면이어서 아주 오랫동안 이 구도에 마음을 뺏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보니, 동네 모습은 마음에 드는데, 술에 취한 수탉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것 같아 구도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더미 책에서 주인공 수탉은 다른 수탉들이 술을 마시는 천막을 벗어나 산길을 걸어 갑니다. 그래도 여전히 선생님의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하지 않았나 봅니다.

결국 더욱 크게 그려진 천막 옆에서 술을 마시며 비틀거리는 수탉을 그리고 나서야, 주인공 수탉의 성격의 변화를 도드라지게 그리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셨나 봅니다. 그림책에는 세번째 더미 책에 그려진 그 장면이 실려 있습니다. 수탉이 팔씨름하는 장면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보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장면은 마치 서양의 원형 경기장을 보는 것 같고, 양계장의 닭장 같은 느낌이 들어 우리 문화와 우리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배경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합니다.

서랍 속에서 나온 또 다른 주인공은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의 할머니입니다. 평소에 눈여겨본 여러 할머니들의 표정과 몸피, 옷차림, 유난히 커다란 손이 있는 할머니들이 서랍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할머니 가운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가 책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서랍 속에는 풍정 마을에 삶터를 꾸밀 때 마당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정유정 선생님이 그린 나무지도도 있습니다. 지금 마당에는 그 지도에 그려진 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제법 주인티를 내고 있습니다. 이억배 선생님의 다른 그림들도 서랍 안에 고스란히 있습니다. 풍경도 있고, 놀아 달라며 아빠에게 떼쓰는 종익이 모습도 있습니다.

1995년에 나온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선생님이 처음으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책입니다. “80년대 후반 들어 작가들이 스스로 기획하여 출간한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백두산 이야기』나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 가 그런 책이지요. 저도, 작가인 제가 작업을 시작해 출판사를 교섭하는 식으로 책을 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만든 책이 『솔이의 추석 이야기』예요.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전통 그림 기법을 섞어 그렸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그림에는 입체감이 없고 선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 그림은 선으로 그리는 그림이지요. 형태와 형태의 경계를 선으로 정확히 나타내 줍니다. 동양화에서 입체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 때문에 그랬지요. 서양에서는 그리는 대상을 물질로 보아 그대로 그리려 애쓰다 보니 빛의 변화에 따른 입체감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동양에서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인격이나 정신의 표현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정조 시대에 청나라에서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이 도입되었는데 단원 김홍도가 그린 수원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 「삼세여래체탱」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민화, 풍속화, 불화 등 우리 옛그림에 빠져 들었는데, 국립 박물관에서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았을 땐 가슴이 뻥 뚫리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선생님이 처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고구려 벽화나 옛 그림의 ‘행렬도’에 매료되어 작업을 시작한 현대판 행렬도로, 우리 식 풍속화입니다.

“문학이 모국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림도 시각적인 공감대를 이루려면 자기 삶의 근거에서 나오는 구체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 영정조시대부터 그런 그림이 그려졌지요. 근대에 들어 서양화되면서 우리의 시각물들이 정리되거나 보존되지 않은 채 사라지게 되었지요. 생활사 자료 연구가 잘 안 되어 그림 그리는 데 어려움이 많아요. 장독대를 보기로 든다면 독의 쓰임새와 놓인 장소에 따라 모양이 다 다른데 그런 자료가 없으니 우리 그림이 세부 묘사에 약할 수밖에 없어요. 세부 묘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무척 중요한 것인데 이것이 잘 안 되어 있으니 사실주의 그림이 발전하기 더욱 힘든 것이지요.

사실주의는 그리는 대상의 본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고, 감수성이나 정신이 배어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사실주의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대상의 세부묘사를 사실주의로 오해하여 자칫 배경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주제인 땀냄새나 때, 시각적 흔들림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에즈라 잭키츠의 그림책 『안경』의 경우에도 그림이 추상적인 것 같아도 사회적 배경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그림책은 삶의 리얼리티를 바탕에 깔고 가는 것이기에 사실주의는 그림책 작업에서 무척 중요한 것이에요.

문화를 생각할 때, 민족 의식과 미술이 만나는 자리에 민화가 있어요. 우리 민화는 그리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움직이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지요. 민화의 그림은 아이들 그림과 같아요. 아이들은 제가 그리고 싶은 주제를 부각시키지요. 즉 그리고 싶은 대상만 그립니다. 그래서 주제가 강하고 주관적인 그림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게 객관적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그림은 바로 아이들이 그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린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 수탉은 다른 닭보다 훨씬 더 크게 표현되었나 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을 왜 아이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민화가 자연주의와 표현주의를 다 안고 있다고 봐요. 민화가 장식적이고 발상이 자유로운 까닭은 그리는 이가 아는 세계를 그려서 그래요. 당시 사람들의 삶이 자연에 기반했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것을 주로 그렸지요. 민화나 아이들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진실되어요. 그래서 민화가 주는 힘은 바로 진실이 주는 힘이지요. 그림이 끌고 가는 힘은 인문학적 기본과 예술적 감동인데 그림책 혜택을 못 받고 자란 사람들이 그림책을 끌고 가니까 힘들지요. 그림책을 빨리 발전시키고 싶은 욕구가 높은 만큼 그림책에 대한 논의도 발전시키고, 작업 체계도 제대로 잡아나가야지요.

『솔이의 추석 이야기』와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두 작품 다 한지에 그렸어요. 한지에 그림을 그리면 서양의 수채화지에 그린 그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어요. 서양 수채화 종이는 종이 위에 물감이 덧씌워지고, 동양화 한지는 물감이 종이에 스며들어 중첩되어 쌓이지요. 마치 얇은 옷감 사이로 속살이 비칠 때처럼 아련하고 그윽한 느낌을 주거든요. 물감을 여러 번 얹어 많이 쌓일수록 더욱 그윽하고 은은한 맛이 나는 것이 한지에 그리는 그림의 특징이에요.

『솔이의 추석 이야기』가 나온 95년에만 해도 한지에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출판사 편집자들이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곤 했어요. 인쇄를 전제로 하는 그림책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한지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지 난감했기 때문이었지요. 농담을 조절하여 그리는 수묵화든 물감을 여러 번 올려 그리는 채색화든 편집자들에게는 더없이 골치 아픈 원화였던 거지요. 많이 변하긴 했지만 한지 그림은 지금도 편집하는 분들이 골치 아파하죠.”

선생님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 그림을 살리고자 고민한 편집자가 있었기에 『솔이의 추석 이야기』는 한지의 장점을 살린 그윽한 그림책으로 출간이 되었고, 다른 나라에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대학에 입학하여 전공으로 조소를 택했지만 사회가 혼란했던 그 시절, 거의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갈 때쯤에는 민중 예술에 눈을 돌려 현장 미술 활동을 하게 되었지요. 졸업한 후에는 안양에서 문화 운동 단체인 ‘우리 그림’과 ‘안양 문화 예술 운동 연합’에서 일하였고, 미술동인 ‘우리들의 땅’에도 참여하셨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공간으로 가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현장 미술 운동 쪽에서 활동했지요. 나름대로 미술의 새로운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활동했어요. 예술의 민주화와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비록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린이 그림책은 어쩌면 운동과 안 맞는 것 같으면서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림책은 대중화로 나가는 길이기도 하거든요. 문화 예술이 엘리트화되고 고립되어 있는데, 이런 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그림책 분야라고 생각해요. 판화 운동, 시민 문화 학교, 미술 학교 활동 등을 할 때, 살아가면서 즐겁게 활동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면 더 좋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지요. 이런 생각이 어린이와 연결되면서, 한솔이에게 그림책을 보여 주면서 자연스레 그림책을 그리게 되었던 겁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지요. 삶에 활력이 생겼고, 처음에는 너무나 행복했어요. 상처받은 정신을 위로받아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즐겁게 그림책 그림을 그렸어요. 어린이 그림책을 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는 상태에서 내가 치료사가 되어 스스로 치유하게 되었지요. 그림책은 사막에서 얻은 물 한 모금처럼 나를 끌어당겼어요. 정말 매력적인 작업이었어요.”

선생님은 『떼굴떼굴 떡 먹기』『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새 하늘을 연 영웅들』『금덩어리에 깔린 욕심쟁이』에 삽화를 그렸으며,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으로 BIB (Biennale of Illustrations Bratislava Slovakia) 선정작가로 뽑히기도 했고 그림책『솔이의 추석 이야기』 『반쪽이』『쏙쏙 배움놀이 1』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그림책을 낸 지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 까닭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지요,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렸지요. 동네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통 작업을 못했어요. 동네에서 불과 1.2킬로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에다 재벌 회사에서 납골당을 포함하여 40만 평이나 되는 묘지를 조성하려 했어요. 안 그래도 주변에 천주교 공원 묘지가 50만 평, 또 다른 교회 공원 묘지가 있는데, 그 묘지까지 들어서면 동네가 어떻게 되겠어요? 돈 되는 일이라면 지역 주민의 뜻을 물어 보지도 않고 그런 일을 하려 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마을 주민들과 힘을 합쳐 반대 운동을 했지요. 조직을 만들고 만화 전단을 만들어 안성 시내의 여론에 호소했지요. 그 일을 일 년 넘게 했더니 마음도 몸도 아주 지쳐 버렸어요.”

그랬습니다. 삶터를 아름답게 지키는 일을 하느라 선생님은 일 년이 넘도록 그림도 못 그렸던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날에 하던 일, 불의와 부당을 참지 못하는 선생님의 정신이 동네 일에 그토록 오랫동안 선생님은 붙들어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풍정 마을 사람이 되어 여기 이곳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니 새로 시작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책을 만들고 싶은데 말이지요. 시 그림책이든 옛이야기든 단편 동화든 여유를 갖고 작업하고 싶어요. 표현 방식은 여러 방면으로 시도를 해 봐야 되겠지만 추구해야 할 주제나 관심 분야는 우리 그림, 우리 전통을 살린 그림이에요. 우리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느낌, 우리만의 어떤 것들을 그리고 싶어요. 우리 문화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부분이 많아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를 파괴한 행동에는 자기 비하가 깔려 있는데, 이것을 극복해야지요.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와 다른 어떤 것, 배타적 민족주의의 견지에서 보는 우리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에게 쌓여 온 어떤 것을 그리고 싶어요. ‘새벽에 우는 수탉’을 보고 느끼는 정서 같은 것이 바로 우리 것, 우리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김치가 없으면 잘 못 먹는 밥 등, 무언가 우리다운 것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불화나 민화도 공부해 보고 싶고 현실 속에서 버리려 해도 안 버려지는 어떤 것을 찾아내어 표현하고 싶어요. 노력한다고 될지는 모르겠는데 스스로에게 내 준 숙제이지요. 여태까지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상당히 피상적인 부분도 있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생활 배경이나 사회적 배경을 살려 내려고 해요.”

창 아래 자리한 선생님의 작업대 옆으로 작업중인 그림과 화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활을 든 작은 사람이 물이 휘감아 도는 커다랗고 널따란 바위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무슨 그림이냐고 하니 심심해서 그린 그림이라며 빙긋 웃으십니다. 그 옆 높다란 책꽂이 위에 오래 전에 만든 장서표 세 장이 사이좋게 앉아 있고, 또한 그 옆으로는 딸 한솔이가 빚은 인형들이 이울어가는 햇님이 보내준 빛에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손수 나무를 마름질하고, 전기대패로 밀고, 지금도 가끔 매끈하지 못한 부분이 손에 만져지면 샌드페이퍼로 매끈매끈하게 다듬기도 한다는 마루 바닥 가운데 놓인 나지막한 상 옆에도 붓과 작은 접시와 그림책을 그릴 때 살펴야 하는 자료가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얼마 전에 그리기 시작한 삼국유사 전집 가운데 ‘선화공주와 서동’ 얘기에 쓰인 물감들이 앙증맞은 작은 접시에 제 흔적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 접시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작은 장 안에는 유리병에 얌전히 담긴 동양화 물감이 들어 있습니다. 진채 작업을 하실 요량으로 사다 둔 물감들입니다. 아교, 백반, 접착제와 발색제를 섞어 그리는 동양화 진채 물감이 고운 한지 위에 제 몸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슥해진 밤, 떠날 시간을 기다리며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 쓴 자동차에 올라 선생님 부부의 따뜻한 배웅을 받습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선생님이 찾는 우리다운 것을 생각합니다.

- 웹진 열린어린이에서 발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